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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섞어라 마셔라 (4)

입력
2014.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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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들이 폭탄주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초반이다. 나는 1974년 입사 후 편집부에 줄곧 박혀 있다가 1980년 ‘서울의 봄’에사 사회부 발령을 받았다. 그 해에는 언론 통폐합이니 사회정화니 해서 세상이 어수선했고 여름인데도 날씨마저 이상하게 서늘했다. 기자들은 줄기차게 술을 마시고 석양주도 빠뜨리지 않았지만 폭탄주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몇 년 뒤 폭탄주 마시기가 시작됐다. 당시 사회부장이 기자들을 술집에 끌고 가 법조계 친구들과 만들어 마시던 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폭탄주의 연원을 따지면 법조계가 언론계보다 먼저고, 그것도 서울이 아니라 강원도에서 시작됐다.

인터넷 위키백과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83년 강원도의 군 검찰 안기부 경찰 등의 지역 기관장 모임에서 처음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고 당시 춘천지검장이던 박희태 씨가 널리 퍼뜨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씨는 나중에 정치인이 되어 국회의장까지 했지만 폭탄주 하나만으로도 후세에 이름을 날리게 됐다.

폭탄주를 처음 봤을 때는 별 희한한 게 다 있다 싶고 긴장도 제법 됐지만, 이내 적응할 수 있었다. 맛도 좋았다. 그보다 몇 년 뒤 검찰간부 진형구라는 분이 대낮에 폭탄주를 마시고는 “양주가 너무 독해 섞어 마셨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명언이었다. 지금은 맥주에 소주를 섞는 소폭을 더 마시지만(양주가 없어서!) 그때는 어떻게 그리 양주가 흔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우리의 단골 술집은 지금 국세청 자리의 한 모퉁이에 있던 2층짜리 작은 집 ‘신우’였다.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이끌린 듯이 기자들은 그 집에 찾아갔다. 야근으로 밤을 새우지 않으면 술로 밤을 새우면서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폭탄주를 마시곤 했다. 초창기에는 폭탄주를 마신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는 풍습도 없었다. 그냥 정직하게, 그야말로 오소독스하게 폭탄주만 돌아가며 마셨다.

술자리는 갖가지 무용담과 특종기로 늘 활기가 넘쳤다. 상대신문 물 먹인 이야기, 멋지게 사진을 구해온(훔쳐온) 이야기, 형사를 사칭해 중요 정보를 빼낸 이야기 등 등. 연조가 낮은 기자나 나처럼 취재수완이 없는 녀석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거 기사 아니야? 아니, 기사 안 쓰고 말로만 하는 거야?” 이런 핀잔을 듣곤 했으니까. 그러면 속으로 ‘아, 이것도 기사구나’ 하며 다음 날 기사를 쓰든지 제대로 취재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언제나 ‘화기갈갈’하기만 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분위기가 좋다는 뜻인 화기애애는 한자로 和氣??라고 쓰는데, 이 ??라는 글자가 ‘갈갈’로 잘못 읽을 수 있어 기자들은 흔히 화기갈갈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여간 술 마시다가 다툼이 생겨 컵이 깨지고 날아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선배에게 귀싸대기를 얻어맞거나 동기들끼리 싸우다가 데스크 선배들에게 도매금으로 혼나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제 갓 입사한 견습기자들이 선배들의 강요에 못 이겨 폭탄주를 마시고 화장실에 달려가 토하던 모습은 대학 신입생이나 다름없이 귀여웠다. 별명이 말코인 선배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계단을 걸어 올라와 2층으로 쓰윽 들어서는 모습은 무슨 프랑스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신우에서는 매일 밤 이야기가 쌓이고 에피소드가 만들어졌다.

밤 12시가 넘으면 주인은 우리에게 집을 맡기고 퇴근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만 마시고 가라고 해도 도대체 말을 들어먹어야지. 술집에서 대충 쓰러져 자고 다음 날 바로 출근하는 녀석도 더러 있었다. 누구라고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기자 하나가 2층에서 잠을 자다가 바닥에 똥을 싸놓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는 한사코 자기가 아니라고 오늘날까지 부인하고 있다.

더 안 좋았던 것은 이제 갓 입사한 녀석이 불을 지른 사건이다. 밤마다 선배들에게 술로 고문을 당하던 그 기자는 엉뚱하게도 술집에 불을 지를 생각을 했다. 신우가 없으면 술을 안 먹일 줄 알았던지 건물 앞 화단에 성냥불을 그어댔는데, 다행히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고 불을 껐기 망정이지 자칫하면 건물 하나가 없어질 뻔했다.

그랬던 신우는 1990년대에 강남 관세청 네거리로 옮겨갔고, 기자들은 거기까지 찾아가 외상술을 마셔댔다. 하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점점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우의 주인 나금녀 씨는 그 뒤 경기도 양평에 ‘중학동 칼국수’를 개업했다. 중학동은 한국일보사가 있던 곳이다. 술꾼들이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던 그는 한국일보를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 기자들 이상이었던 사람이다. 받지 않은 외상값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30여 년 전에 매일 ‘섞어라 마셔라’ 했던 기자들 중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술은 더 풍족해지고 폭탄주 종류도 수없이 많아졌지만 그때 그 술집, 그 신문사 건물 모두 이제는 지상에 없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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