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미일 정상회담에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까지 오랫동안 고심을 거듭한 것은 한일관계의 민감성과 아울러 대내외적으로 고려할 요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당초 한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혈맹인 한미관계의 '명분'을 지키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변화라는 '실리'를 동시에 얻고자 했다. 역사문제로 줄곧 일본과 틀어지는 상황에서 4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한일 양국 순방을 앞둔 미국의 우려를 씻고, 이를 계기로 일본을 압박해 시급한 현안인 위안부 문제 등에서 가시적인 진전을 이루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미국과 일본 양국이 일찌감치 3국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끝까지 시간을 끌었다. 정상회담에 매달리는 일본을 향해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미국을 통해 일본의 태도변화를 우회적으로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회담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는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정부의 입장은 곤궁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점을 제외하면 일본 정부는 추가로 전향적인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내각이 계승해 온 고노 담화를 아베 내각이 부정한 점을 감안하면 한일관계는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에 불과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한미일 정상회담 수용 쪽으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 변수 때문이다. 미국이 한미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모양새를 취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사태가 핵 안보정상회의 주 의제가 돼 3국이 한 목소리를 내기를 원하는 미국의 입장을 외면하기 어렵다. 또 한일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4월 아시아 순방 일정에 한국 방문을 억지로 끼워 넣게 된 채무도 있다. 외교 소식통은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한미일 정상회담 수용을 바로 발표하지 않고 20일 하루 더 시간을 갖기로 한 것도 막판까지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좀더 성의를 보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 입장에서 마냥 반길 수 없는 한미일 정상회담이지만 이를 계기로 한일관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아베 총리도 박근혜 대통령이 그간에 취해온 입장에서 물러서는 상황을 모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측의 진정성 있는 조치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고,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아베 총리가 한미일 정상회담 이후 한국을 자극할 가능성이 낮아졌으며, 과거사 문제 등에 진전된 자세를 보일 경우 한일관계는 선순환 구조로 돌아설 수 있다. 아베 총리도 당분간 야스쿠니 참배 이후 달라진 미국의 태도와 오바마 대통령의 방일을 염두에 두고 외교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초등학교 교과서 검정 발표를 26일에서 내달로 늦추는 등 성의를 보이던 일본이 정상회담 이후 위안부 피해자나 독도문제 등에서 여전히 퇴행적 자세를 보일 경우다. 이 상황이 전개되면 박 대통령이 국내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한일관계가 더 깊은 암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일본과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한미일 정상회담 이후가 더 골치 아플 수 있다"고 말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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