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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3월 18일] 말들의 어떤 풍경

입력
2014.03.1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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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모든 규제들은 대부분 사후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문제점이 발생한 뒤 그것을 개선하거나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선제적으로, 미리 예견해서, 그것을 만들진 않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모든 규제의 뒤에는 그 나름대로의 풍경과 상처가 숨어 있다. 학교보건법만 하더라도 과거 신도시 중ㆍ고등학교 인근에 우후죽순 생겨났던 러브호텔로 인한 폐해, 거기에 따른 많은 사람들의 반발과 요구 등으로 강화된 것이다. 그러니 그 규제 속에는 이미 고통 받은 많은 사람들의 상처까지 포함되어 있는 게 맞다. 대형 마트의 설립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각 지자체의 조례나 무분별한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규제, 연이율 200%가 넘는 사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 등도 모두 엇비슷한 사정이 포함된 제도들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 무늬도 제각각 달라 그것을 지속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동물들의 약육강식 세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점까지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규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우리의 욕망을 욕망 그대로의 날 것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나름대로의 순기능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규제들도 존재한다. 규제 또한 인간이 만드는 것인지라 많은 사람들은 만족한다고 해도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겐 절대적인 손해로 돌아가는 것이 있고, 이쪽과 저쪽으로 팽팽하게 갈려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오로지 규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권력과 이익에 종사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구시대의 유물처럼 활자만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있다. 게임 산업만 하더라도 그것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에겐 셧다운 제 같은 것이 마음을 위축시키는 제도로 다가오겠지만, 밤낮 없이 게임에만 몰두하는 중2 아들을 둔 학부형들에겐 진작부터 생겼어야 할 규제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그런 다양한 목소리들을 조정, 합의해 나가는 것이 정치인들의 역할일 텐데, 그 역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규제의 성격이 점점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규제에 대해 "쳐부숴야 할 원수", "암 덩어리" 같은 말들을 써가면서 혁신의 당위성을 주장한 모양이다. 대통령이 말한 규제들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시를 들지 않아 섣불리 판단내릴 순 없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아마도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들을 지칭한 듯싶다. 그 말을 접하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부끄러움이었는데, 그건 단지 투자와 공공의 목적이 충돌할 때 어느 편을 들 것이냐, 호텔을 지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먼저냐, 아이들의 교육적 환경을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냐, 하는 가치 충돌의 상황에서, 대통령의 민낯을 그대로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오직 "쳐부숴야 할 원수", "암 덩어리" 같은 말의 수사법에 있었다. '쳐부수자 공산당'과 같은 1960, 70년대 반공 포스터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저 말들은, 죽어 있기 때문에 허망하고, 모든 사태를 선악의 잣대로 구분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다. 그것은 또한 그 이전에 했던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말과도 겹쳐져 대통령의 자기표현 방식에 대한 회의까지 이어졌는데, 이미 죽은 표현들과 시중에 유행하는 단어들을 고스란히 갖다 쓰는 수사법에서 세상과 자기를 확고하게 동일시하는 어떤 단단한 콘크리트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상엔 나와 다른 사람들도 있고, 내가 모르는 세계도 있구나.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어떤 한 대상을 가리켜 '원수'나 '암 덩어리'와 같은 표현을 쓰지 못한다. 그 안에 어떤 상처가 있고, 또 어떤 처지가 숨어 있는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조심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자기만의 표현, 자기만의 언어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말꼬리잡기 비판이 아니다. 지금의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수필가로 활동한 문인이다. 나는 지금 그 문인에게 고언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 소설가ㆍ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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