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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3월 18일] 호미를 들고 들에 나가 새봄을

입력
2014.03.1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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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의 유일한 기억은 일방적으로 끊임없이 지시하는 화려한 패션 대통령과 고개를 푹 숙이고서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늙은 비서나 장관들의 추리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화려한 패션으로 감추어도 그런 권위주의가 반세기도 더 전부터 뇌리에 뿌리박힌 구태의연한 악몽의 불쾌한 반추에 불과하다. 나보다 더 늙은 왕년의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의 애늙은이들과 함께 고개 숙이고 있다는 역겨운 점도 마찬가지다. 항상 지시만 하는 1인과 고개 숙인 대다수 국민의 풍경은 사회 곳곳에서 무한 재생산되고 있는 황당무계함도 같다.

흔히들 말하는 대통령의 불통은 야당이나 국민과의 불통이지만 나에게는 권력층 그들끼리의 불통이 더욱 걱정이다. 고개만 숙이는 자들과 어떻게 통할 수 있을까? 그래서 계속 문제가 터지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일방적인 지시의 불통으로 일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반세기 전 과거에도 통했다고 하여 의도적으로 대립과 분할을 조장하는 불통의 권위주의를 선택한 것일까? 자신을 지지하는 부동의 50% 이상이 그것을 반세기 전처럼 위대한 천명의 신비한 통치 스타일이라고 믿는다고 만족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난 1년 정부의 높은 지지율은 불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일관된 '붙통'의 당연한 결과일까? 지지율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수많은 공약의 폐기와 모든 차원의 양극화 확대와 심화 등등 충분히 있다. 그러나 도리어 그런 결과로 인해 부동 지지율은 더욱더 확고부동해지는 이 해괴한 현상은 나치나 스탈린 시대는 물론 여러 비민주 정부의 행태를 살펴보아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그런 지지율을 낳는 것은 일방적 지시 스타일만이 아니라 지시 내용도 옛날 그대로이기 때문이 아닌지 모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야당이나 언론이 어떤 정치적 비판을 해도, 지시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대중의 말초적 관심의 충족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관심을 달래주는 고마운 말씀을 패션처럼 화려하게 보여주고 그 감동을 어용 언론은 확대 포장한다. 철도파업이나 의료파업의 원인인 민영화 문제를 특권이니 불편이니 하는 등의 대중적 혐오 정서를 교묘하게 건드려 은폐하는 것이나, 세 모녀 자살 사건 뒤 양극화 극대화나 OECD 최하의 복지 수준은 아랑곳없이 찾아가는 복지를 하겠다 하여 국민을 감동시키는 것들이다.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이라는 소위 4대 사회악 척결은 삼청교육대까지 이르는 깡패 척결을 비롯한 정권 초기 포퓰리즘의 반복 시동으로 항상 반복된 것이지만, 그 근본 원인의 폭력적 사회구조의 척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파업도 시위도 항의도 모두 종북이라는 악으로 비난될 뿐 그것이 국민의 정당한 인권 행사라는 것은 항상 묵살된다.

감상적 애국심을 건드리는 배타적 애국주의를 기반으로 한 안보 통치도 전혀 변하지 않은 옛 가락 패션일 뿐이다. 문화를 수단으로 삼아 산업과 융화시켜 창조경제를 실현한다는 경제 발전 모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구태의 반복이다. 창조경제라는 것이 과거 태국에서 실패한 크리에이티브 이코노미 운운하던 것의 재탕인가 하여 색바랜 옛 사진까지 찾아보았더니 내용이 없는 낡은 패션인 것이 같을 뿐이다. 문제는 그런 패션 권위주의의 내용까지 통치의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바야흐로 자유와 인권, 민주와 평화라는 기본가치를 옛 추억으로 사라지게 하는 권위주의 망령이 우리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래서 지난 반세기 피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민주주의가 일거에 순간의 환각처럼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호미 들고 들에 나가 봄을 줍는다던 구양수의 봄은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다시 찾아왔다. 변화의 가슴은 가슴의 변화다. 개혁의 마음은 마음의 개혁이다. 불통으로 막힌 가슴을 트는 새로운 혁명의 정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죽은 패션으로 위장된 구태의 화려한 거짓 권위주의가 아니라 새롭게 피어나는 봄처럼 부활하는 트인 가슴의 민주주의로 소박하게 새로운 정치는 시작된다. 모두들 호미를 들고 들에 나가 새봄을 줍듯이 다시 민주주의를 시작하자.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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