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이상 회사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분이 퇴직금을 들고 한 금융회사를 찾아갔다. 추천받은 여러 가지 금융상품 중 하나에 가입기로 했다. 담당 직원이 고맙다고 선물까지 주면서 마지막으로 설문지를 하나 작성해달라고 부탁하더란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직업란에 표시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원부터 시작해서 공무원, 교사, 교수, 자영업, 학생, 주부 등 다양한 직업을 나열하고 있었지만, 어디다 표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무직(無職)'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0년 이상이나 회사에 다니다 나이 들어 은퇴했는데 무직이라니, 그럼 내가 실업자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억울하기도 하고 괘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처럼 은퇴한 사람을 위해 직업란에 '은퇴' 또는 '정년퇴직'이라는 항목을 더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나왔다고 한다.
최근 직장생활에서 은퇴하기 시작하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들이다. 계획적인 경제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수출제조업과 무역 관련 서비스업에 뛰어든 기업들이 늘면서 1970년대 초 중반에 직장을 잡은 50년대 전반부 세대를 잇는 바로 다음 세대들이다. 이들이 직장을 잡기 시작한 70년대 후반만 해도 그간의 봉제와 가발, 합판과 같은 경공업을 넘어 철강, 조선, 기계, 화학제품 등 중화학공업이 자리 잡거나 확장일로 걷기 시작한 때였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이 연간 2,100시간에 달해 세계 최고수준이지만 30여 년 전에는 3,000시간을 넘었을 것이다. 베트남과 독일, 중동 등 세계 전역에 나가서는 더 열심히 일했다. 이들 덕분에 우리 경제는 1977년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넘어 95년에는 대망의 1만 달러를 달성했다. 이후 외환위기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2007년에는 2만 달러를 넘어섰고 이제 3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직장에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대에 시작해서 2만 달러를 열고 3만 달러 시대의 기반까지 다졌다고 할 수 있는 세대들이다.
그러나 직장에서 물러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시각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그다지 따듯하지만은 않아 마음이 아프다. 열심히 일한 이들의 노후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통계들이 쏟아져 나오고 길거리에는 여기저기 폐지 줍는 노인들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율이 48%를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수준이라는 통계까지 나오면서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빈곤층으로 빠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까지 생겨나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지난 수백 년간 이어온 효도사상이 약해지고 있는 가운데 고성장의 주역이었던 한국의 노인들이 과거에 겪었던 가난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후진국에서 선진국 대열로 올려놓은 이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표시는 못 할망정 후배들에게 등을 떠밀려 마지못해 물러나는 늙은이 대접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들에게 노후에 7억원 또는 10억원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불필요한 불안감을 키워서는 안 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이 노후가 아닌가? 은퇴자 또는 은퇴를 앞둔 사람들도 보다 당당한 은퇴를 위해 미리미리 노력하고 준비해야 하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가족과 사회, 국가가 도와줘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은퇴준비는 은퇴하지 않는 것이라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은퇴하기 마련이다. 은퇴 또는 은퇴자라는 말을 할 때 계면쩍거나 뭔가 남부끄럽기보다는 그간에 열심히 일한 노력이 스스로나 사회적으로나 자랑스러울 뿐 아니라 자긍심 넘치는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은퇴자는 실업자나 무직자가 아니라 우리 가정과 사회가 진정으로 감사하고 존경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ㆍ 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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