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무자이면서 무용수인 아내요즘 현대인들 머리만 활성화몸을 일깨우고자 즉흥춤 도입공연 전에는 관객 대상 강의도● 영화감독이자 안무자인 남편관객과 다양하게 소통하고자무용수들 연습하는 과정 담아실제 무대서 촬영 영상 상영● 자유 정신 구현한 열린 무대"무용수가 자신을 드러내도록테마나 구성 우리가 연출해줘"공연 마무리는 객석과의 대화
햇살 눈부신 연습실. 아직은 아무도 올 시간이 아니다. 여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 순간의 쉼 없이 동작을 이어갔다. 중국의 태극권처럼, 또는 뱀의 움직임을 연상케 하는 인도의 전통 무용처럼. 바로 옆에서 지켜 보는 남자의 시선이 조금 독특하다.
영화 감독으로서 렌즈 바로 뒤에 숨은 냉철함이라기보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촬영할 때처럼 대상에 밀착하려는 온기가 느껴진다. 상주 작가로 작업 중인 서울문화재단 홍은예술센터의 널찍한 연습실에서 두 사람은 정밀하게, 진지하게 발언하고 있었다. 예술의 공공성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현대 예술에 대해.
안무자이면서 무용수인 국은미(44ㆍ숨 무브먼트 대표), 영화 감독 권병철(44ㆍ상명대 영화영상학과 교수)부부. 권씨는 드라마트루기(혹은 편집)이면서 무용의 연출 격인 안무 작업도 하는 동업자다. 연출이야 원래 공동 작업이었지만 세월이 오래 되다 보니 칼로 두부 자르듯 역할을 구분하기가 모호하다. 무용에서의 연출이란 각각의 연속된 움직임을 구성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보통 안무자는 혼자서 안무와 연출 작업을 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으로 작업한다. "구체적 움직임은 안무, 다듬고 편집하는 것은 연출"이라고 권씨가 통상적 원칙을 일러준다. 일반 무용계에서는 연출 작업을 하는 안무와 세부 동작을 다듬는 조안무로 나눠져 작업이 진행된다(일상적인 무대 언어라면 구성 정도의 용어를 썼겠지만 '편집'이라고 하는 걸 보니 영화 감독으로서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국내 무용계에서의 부부 협업으로 치자면 선배 격인 류석훈(무용) - 이윤경(무용), 김형수(미디어 아트) - 김효진(무용) 커플이 있긴 하다. 또 해외의 현대 무용계에는 안무자와 연출자가 동성애 부부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영상을 쓰지만 몸과 춤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부부는 유(類)를 달리 한다.
두 사람의 작업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개념어는 즉흥성. 최근의 작업 방향을 집적하는말이다. 2002년 숨 무브먼트 결성 이후 2008년까지는 사전 구성에 의한 무대였으나 이후 즉흥에 기회를 부여하는 빈도가 많아진 것. "즉흥에 의해 몸은 훨씬 생동감을 갖게 된다. 댄서는 그 덕에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되고, 몰입도가 높아지면서 육체와 표정이 살아난다."
사실 전문적 관객이 아니라면 그 같은 변화를 알아채기는 힘들다. 즉흥성이란 무용수에 의한, 무용수를 위한, 무용수의 무대를 만들자는 작업의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칼자루를 (연출자가 아니라)무용수가 갖게 하자는 것이다.
지난해의 무대'Walking''몸 / 춤'이 바로 그런 무대였다. 일반인을 위한 워크숍의 주제도 바로 즉흥춤이다. 구체적인 무용에 들어가기 전 1시간 정도 관련 강의를 펼친다. "절대 시범 동작을 보여주지 않아요. 참여자의 적극성이 가장 중요하거든요."지난해 여름 일반인들이 무용수와 함께 아르코극장에서 공연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공연예술센터에서 처음 시작한 일반인 대상 워크숍 덕분이었다.
2008년 만난'소메틱(someticㆍ심신 통합의 움직임)'이론은 부부에게 계시(啓示)였다. 자신의 몸을 대상 혹은 수단으로 보지 않고 주체로 인식, 자기의 몸을 자각하고 나아가 마음과 합일을 이루자는 이론은 영감에 가득 차 있었다, 머리만 지나치게 활성화돼 있기 십상인 현대인들에게 몸을 일깨우고 나아가 마음과 소통하게 하자는 이론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예견한 듯 했고, 그 해 실제 춤에 도입됐다.
21세기 들어 몸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이기도 했다. 1960년 대 미국의 철학박사 토마스 한나가 완성한 sometic이란 개념은 이후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 몸 수련법의 과학적 효시를 이뤘다. 신체의 자생력, 몸과 마음의 조화는 그 핵심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수행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문화사적으로 말하면 소비자본주의의 이면을 본다는 것이죠." '춤 추는 몸의 영화적 전달'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한 권 감독은 강의 아니면 무용 작업으로 대별되는 자신의 현재를 광의의 영화 작업이라고 칭했다.
이들 부부는 현재 sometic 커리큘럼 중 전문가 과정인 펠덴크라이스에 몰두하고 있다. 그 개념을 맨 처음 고안한 사람의 이름을 딴 이 과정은 몸의 움직임을 2,000가지로 분류해 두었다. 그는 젊어서 퀴리 연구소에서 연구 중이던 신예 물리학자답게 정밀한 신체 이론을 펼친다. 그것은 나아가 숨 무브먼트의 방법론이다. "무용수 스스로가 먼저 자신의 몸을 알아야 하거든요."
20여 년 전 체육계의 관심을 끌었던 번역서'몸학'의 테마가 무용계로 이입된 셈이다. 구성을 중시하던 기존 무용의 무게 중심을, 즉흥성에 두자는 혁명적 이론이었다. 예전에는 무용수가 훈련 받은 움직임을 기억해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해야 했으나 이제 스스로 즉흥성 아래 몸의 움직임을 주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 가는 길이 그렇게 열렸다. 아직 국내 무용계에서는 실제 무대화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무용 교육의 측면에서는 확산되고 있는 이론이다. 무용수 개인의 내면적 자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선두가 숨 무브먼트. 실제 몸의 움직임은 극히 부드럽고 느리다. 그렇듯 고도로 이완된 동작을 하면서 무용수는 자기의 몸을 자각해 간다. "실제로는 무용수가 스스로 자유스럽게 출 수 있는 테마나 구성을 우리가 짜 주죠. 무용수가 최대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말하자면 이사도라 던컨, 마사 그레이엄 등 현대 무용의 선각자들이 추구했던 자유의 정신을 실제로 구현해 내기 위한 실천론이다. "긴장된 고전 발레에 이완(release)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던 그레이엄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셈이죠."그러나 아직은 해외에서도 소극장 무대 차원의 새 흐름이다.
처음부터 이들은 열린 무대를 지향했다. 초창기인 2002년~2005년, 이들은 미리 준비해 둔 공연 촬영 영상을 실제 무대에서 트는 방식으로 영상을 도입했다. 그러나 현재는 훈련 혹은 연습 과정에 남편이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다. 실제 무대에서 그 영상은 30분짜리로 편집돼 객석에게 상영된다. 다음, 영상 속의 인물들이 나와 20분여 동안 실연된다. 이어 10분 간 객석과의 대화로 마무리된다.
"나는 영화를 전공했지만 무용이 좋다. 별다른 서사나 극적인 장치 없이,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기 때문이다."권씨는 21세기 버전의 언외별전(言外別傳)을 추구하는 셈이다. 그러나 자신의 본령을 항상 의식한다. 그는"관객들과 다양한 영상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라며 "(나의 작업은)영상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가 무용수들에 바짝 다가가서 길어 올린 일련의 동영상은 몸의 섬세한 변화가 주는 감동을 즉물적으로 전한다. 설득의 힘은 작위적 연출이 일절 배제된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그는 "움직임 자체를 극화시키는 영화"가 자기 영상 어법의 새 테마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부산 출신으로 무대라고는 연극 한 편 못 본 남편은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아내는 이화여대 무용학과 88학번이다. 대학 2학년 때 우연히 현대무용을 처음 본 후 관심을 갖게 되면서, 때마침 선배가 소개해 준 국씨의 연습 현장에 그는 자연스럽게 섞여 갔다.
1995년 뉴욕 티쉬(Tisch) 예술학교 대학원에서 무용 실기ㆍ안무를 공부하고 있던 국씨보다 1년 늦게 남편은 미국으로 와 뉴욕의 공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IMF 직전이었죠." 1998년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이들은 1주일 함께 살다 각자의 목표를 위해 생이별 했다. 아내는 다름슈타트 시립무용단에 한국인 최초로 입단하더니, 얼마 뒤 수석 무용수로 오른다. 동양인으로서는 드물게 알반 베르크의 현대 오페라 '룰루'의 타이틀 롤을 맡았던 화제의 인물이었다. 1주일 같이 살고는 적어도 5개월은 떨어져 있는 생활을 계속하던 별난 부부는 2000년 넉 달 간격으로 모두 귀국, 한 해 뒤 첫 아이인 딸 아진(14)을 얻는다. 아들 무진(9)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부부가 작업 중인 서울문화재단 산하 홍은예술창작센터는 넓고도 쾌적하다. 지난해 5월부터 오는 4월까지 숨 무브먼트는 상주 단체로 선정돼 있고, 대표 국씨는 입주 작가다. 이전에는 지하 연습실을 전전했다. 아직 바람 끝이 매서운 초봄 이들의 조금은 낯선 생명의 율동이 따사로웠던 데에는 쾌적한 공간도 한몫 했다.
장병욱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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