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베스트셀러 등 통해 접근… 기업 채용·직원교육도 점차 늘어성과주의로 물든 불안한 사회서 인문학 중요성 알리는 씨앗 뿌려"감기약 사 먹듯이 쉽게 삼켜" 껍데기식 소비 풍조에 회의론도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30여년 동안 독일 철학계를 격렬한 논쟁의 장으로 이끌어온 재독철학자다. 2011년 에 이어 최근 를 국내 출간하면서 잠시 짬을 내 방한한 그가 단 한 차례 대중 앞에서 강연하는 곳은 놀랍게도 대학 강의실이나 인문학 연구자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두산아트센터가 마련한 인문학과 공연이 어우러지는 만남의 장소, 다름 아닌 연강홀 연극 무대다. 그의 책 가 날 선 인문학의 용어들로 설명했던 불신사회와, 그것에서 발현된 투명사회가 낳은 부조리를 뭉툭하지만 대중적인 언어들, 그리고 무대라는 세속적인 공간으로 '먹기 좋게' 버무려 놓은 '대중인문학'의 좋은 예다.
이데올로기가 단단한 외피처럼 인문학을 감싸 안았던 시절, 대중에게 이는 그저 딱딱하고 모호한 텍스트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인문학에 대한 사색은 연구자의 몫이요, 교양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렵게 도전해야 하는 먼 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희랍어와 라틴어로 뒤덮인 철인의 대화록에서 튀어나온 듯, 근엄했던 학자들이 강단을 떠나 대중의 아픈 삶을 위무하는가 하면, 마치 장르소설처럼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가벼운 저작들로 인문학의 살을 발라 베스트셀러의 매대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이 같은 대중인문학을 널리 생산하고 소비하는 기류는 사회 전 분야에서 강하게 감지된다. 대중적 인문학자의 선두격인, 의 저자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이미 수년 전 예능프로그램 KBS '1박2일', MBC '놀러와' '무릎팍도사' 등에 잇따라 출현해 인문학의 가치를 전해왔다. 이어 김난도 서울대 교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 슬라보예 지젝 등 국내외 유명 인문학자들이 대거 방송사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들의 저작을 쉽게 독해했다. 기업들도 너나없이 사원채용과정에 인문학의 잣대를 들이댔고 직원 대상 강좌에 쉬운 인문학을 선보였다. KB국민은행은 2012년부터 신입사원 심층면접에서 등 인문학 도서 28권을 바탕으로 토론하도록 했으며 삼성, 현대자동차, GS 등도 채용시험에서 문학ㆍ역사ㆍ철학 관련 문항을 점차 늘려가고 있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업무영역과 인문학을 접목하는 시도들도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 대중인문학의 활용 분야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대한생명은 2년 전부터 직원 대상 인문학 교육 과정을 개설했다. 제목은 '인문학에서 보험을 만나다'이다. 생명보험의 본질이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판단 아래 만든 과정이라고 한다.
인문학이 기업의 고객 서비스 키워드로 등장하기도 한다. 더베이직하우스 비즈니스 캐주얼 브랜드 마인드브릿지는 2012년부터 인문학콘서트를 열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을 초청한 데 이어 작년에는 'Why Work(왜 일을 하는가)?'를 주제로 서울 와우북 페스티벌과 공동으로 인문학 행사를 진행했다. 다양한 인문학 콘텐츠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배포하기도 했다. 옷을 파는 기업과 인문학의 만남은 더 이상 예능 프로에서 인문학자를 만나는 것만큼 이상할 것 없는 일상의 장면이 됐다. 인문학 교육 사이트 아트앤스터디의 이혜진 기획팀장은 "2000년 서비스 시작 이후 요즘처럼 회원이 많았던 적이 없다"며 "개인보다 기업이나 관공서 쪽에서 인문학 콘텐츠와 강의를 물어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왜 한국 사회는 인문학을 쉽게 소화하고 대중의 눈높이로 끌어내리길 원할까. 전문가들은 '힐링'에 다급해진 대중, 그리고 힐링이 여러 모순을 잠재울 적당한 처방이라 믿도록 만든 사회구조 때문이라 지적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과, 최근 를 낸 인문학자 엄기호는 일명 '이케아 세대'를 들어 이 현상을 설명한다. "최고의 스펙을 갖췄지만 언제라도 쉽게 버려지는, 이케아 가구를 닮은 지금의 30대들은 평탄한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죠. 이들 귀에 반체제적인 인문학 강의, 대중인문학은 쏙쏙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한기호) "잉여가 되고 마음을 공유하고 힘이 되어줄 '곁'이 사라지면서 이케아 세대는 포장이 잘된 인문학을 사고 싶어 하죠. '곁'을 인위적으로 구입하는 셈이죠. 힐링이라 쓴 대중인문학들이 판매되니까요. 하지만 대중인문학이 어떤 해답을 주진 않아요. 답은 대중이 직접 찾아야죠."(엄기호)
최근 대중인문학이 확산되는 중심에 철학자 강신주가 있다. 강한 자아를 만들기 위한 철학의 본령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그는 어려운 저술보다 청중 혹은 개인의 눈높이로 내려온 상담과 독설을 선택했다. 오래 전 원효와 차라투스트라가 그랬듯, 강신주는 저잣거리의 말을 하며 시장통의 흙을 만지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자만이 진정한 인문학자요 철학자라고 말한다. 개인 삶의 명치를 아프게 찌르는 그의 상담은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책 과 시리즈, 라디오와 팟캐스트, SBS '힐링캠프' 등에 실려 전방위로 뜨겁게 소비됐다. 쉬운 인문학, 현장 인문학의 보급에 앞장섰다는 평가, 그리고 깊이 있어야 하는 인문학을 너무 쉽게 소비하는 풍조를 부채질했다는 비판과 그의 거친 화법에 대한 비난이 뒤섞여 들끓기도 했다.
강신주로 대표되는 대중인문학의 확산을 바라 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우선 기능주의와 성과주의로 물들어버린 신자유주의 사회에 인간을 앞세우는 인문학의 중요성을 알리고 한 단계 더 앞선 인문학 공부의 씨앗을 심는다는 점에서 긍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민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시스템에서 자라 어른이 되죠. 누구도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고요. 사회는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고도의 감수성을 요구하는데, 인문학적 소양 없이 사회로 나섭니다. 삶이 거대하게 공허해지겠죠. 이걸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쉬운 인문학을 소비하려는 욕구가 생기고요. 강신주와 같은 학자가 대중에게 강연할 때, 말 그대로 씨앗을 뿌리는 건데 대학 강의처럼 할 수는 없겠죠. 조금 점잖거나 혹은 조금 과격하거나 할 수 있어요. (대중인문학이) 정치 얘기를 너무 하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 하기도 해요."(을 출간한 민음사 장은수 대표) "강신주 선생의 인문학이 많이 팔리는 현상은, 불황으로 고전하는 인문도서 출판계 종사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쁠 게 없어요. 대중을 상대로 풀어내는 인문학 상품들이 화법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이 다르지 않죠. 학술서의 요지와 주옥 같은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책의 가치는 높아요. 하지만 인문학 붐에 편승하는 유사 인문서가 범람한다면 문제겠죠."(황혜숙 창비 인문팀장)
대중인문학의 전달방식, 그리고 '깊이'의 학문인 인문학을 겉핥기로 만족하도록 이끄는 기류가 문제라 말하는 이들도 많다. 인문학이 모순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변화를 가능케 할 동력을 지녔는지에 대한 원천적인 의문들도 쏟아진다.
"아프고 불편하다 싶으면 감기 걸렸다고 약방에 가 감기약을 사 먹잖아요. 이렇듯 (쉬운) 인문학 글을 사서 '삼키면' 되겠다고 생각하면 인문학 망해버려요. 그건 인문학이 아니지. 통상적으로 인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수천 년이 된 사유라도 늙지 않은 것, 시효가 끝나지 않은 사유들이죠."(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인문학이 삶에 기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중인문학에 나서는 학자들이) 먼저 답해야 합니다. 인문학 책을 읽고 소비하는 게 대안인지 짚어야 한다는 말이죠. 강신주 박사가 대중과 만나는 접점에서 건너뛰고 생략한 부분이 많이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을 즐기는 능력이 삶을 윤택하게 해줄 여지가 별로 없어요. 사실 강신주 박사의 방법을 인문학이라 말하기 힘들어요. 경제인들이 인문학 강좌를 듣는 것, 자기 아래 사람들 어떻게 이해하고 부릴까 이런 걸 익히는 게 목적이니까 그분들이 '요약'으로 인문학을 소비하는 것이죠. 인문학의 껍데기만 갖고 있는 셈입니다."(한윤형 자유기고가)
대중인문학 열풍이 인문학 열풍으로 이어지긴 하는 것일까. 아직은 찻잔 속 폭풍인 듯하다. 서점가에서 대중인문학 서적이 가끔 종합베스트셀러에 오르지만 전체 인문학 서적의 판매량은 그저 그렇다. 교보문고 집계에 따르면 의 인기가 높았던 2011년 인문분야 판매 신장률(1,2월 기준)이 107%(100%를 넘으면 성장)를 기록했을 뿐 2012년 53.8%로 급감했고 그나마 올해 105%로 회복한 정도다. 도서출판 난장의 이재원 대표는 인문학의 대중화가 인문학 열풍이 아닌, 그냥 스타 저자의 인기를 의미할 뿐이라고 말한다. "독자의 독서 호흡이 짧아졌고, 배우 김수현이 드라마에 들고 나오는 책 정도나 잘 팔리고 있어 학자들은 허탈해하고 있어요. 지금 잘 팔리는 인문학 서적들은 개인적으로 처세술 책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스타 학자에게 자극받은 독자가 다른 인문서적을 찾거나 하는 느낌은 없어요. 거품이랄까. 출판계는 오히려 나빠졌어요."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