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 보기] <5> 갱피 훑는 여자의 노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 보기] <5> 갱피 훑는 여자의 노래

입력
2014.03.13 13:54
0 0

'성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우리 부모 모셔다오.' 이렇게 시작하는 옛날 노래가 있다. 첫 대목은 이렇게 구애의 노래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농부가와 비슷한 노동요로 바뀌는 것이 흥미롭다. 사랑의 단꿈이 노동의 채근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까, 연애와 노동을 한 결로 끌어안는 노래의 관대한 오지랖을 말해야 할까. 노랫말이 이 노래와 같은 형식으로 시작하는 또 다른 노래가 있다. '진개맹갱 오야미들에 갱피 훑는 저 여자야, 갱피 진피 그만 훑고 이 내 얼굴 바라보소.' 말하는 품은 얼추 비슷하나 뒤의 노래에는 비극적인 이야기 하나가 따라붙어 있다. 진개맹갱은 김제 만경이요, 오야미들은 수많은 논이 한 배미처럼 펼쳐져 있는 들이니 곧 호남평야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잡초일 뿐인 피를 옛날에는 논에 심기도 했다. 피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가뭄에도 잘 견디니 구황작물로 한몫을 했다. 갱피는 심지 않아도 논두렁이 개울가에서 자라는 피, 곧 야생 피를 말한다. 갱피에 알곡이 많을 수는 없다. 비극적인 이야기도 거기서 시작한다.

어느 고을에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글공부에 열심이었으나 삽 하나 꽂을 땅이 없이 가난해서 아내가 들에서 훑어오는 갱피로 연명하고 살았다. 아내는 부지런하였으나 앞길이 캄캄하고 가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선비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개가했다. 그러나 그 남자도 곧 세상을 떠났고 가난은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선비는 온갖 역경을 헤치고 공부에 몰두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했다. 옛날 살던 고을의 원이 되어 삼현육각을 잡히고 말 위에 올라 호남평야를 지나는데, 한 여자가 갱피를 훑고 있다.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아내가 분명하다. 선비가 저 노랫말로 말을 거니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큰 관을 쓰고 신수가 전과 달리 훤하다 한들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갱피 훑기 마다더니 가는 죽죽 갱피 훑네." 선비는 야유하였으나 여자는 종살이를 하더라도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바구니에 담긴 갱피를 개울의 진창에 쏟고 그것을 다시 한 톨 남김없이 주워 담으라고 했다. 물론 그럴 수 없는 일이다. "한 번 잃은 절개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남자는 냉정하게 말하고 떠났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야기는 초라하지만 한 시대의 사상을 유감없이 표현한다. 남자는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입신양명해야 하며, 여자는 제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절개를 지켜야 한다. 이 문제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되지 않는다. 끝내 한 남자를 섬기는 데 실패했던 여자는 그 처지가 아무리 비참해도 동정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었던 1950년대까지, 아니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땅에는 저 여자를 변호해 줄 노래도 이야기도 없었고, 저 여자를 위한 사상이 없었다. 저 여자를 위해서는 아무도 말을 만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할 때, 저 여자가 남자를 버리고 떠나게 된 정황을 특별히 길게 서술했다. 어느 날 여자가 아침부터 훑어 모은 갱피를 멍석 위에 널어놓고 또 다시 들판에 나가 갱피를 훑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으나 멍석 위에 널어놓은 갱피는 벌써 떠내려가고 없었다. 선비는 여전히 마루에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책 읽기에 몰두한 선비는 소나기가 쏟아지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갱피는 책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가. 그 갱피가 여자에게는 얼마나 중요한가. 여자는 남자를 떠났다. 이 정황의 세부 서술이 여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자의 떠남이 어느 한 나절의 변덕이 아니라 거의 운명적 필연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세부가 절개 없는 여자를 불운한 여자로 바꿔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이 세부가 유교적 윤리를 강조하는 이 이야기 속에서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여자의 절개를 겉에 내세우는 이야기라면 고전소설 '춘향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춘향의 이야기라고 해서 다른가. 우리는 춘향이 옥중에서 꾸었던 꿈을 기억한다. 춘향은 장님 점쟁이에게 "단장하던 체경이 깨져 보이고, 창 앞의 앵두꽃이 떨어져 보이고, 문 위에 허수아비가 달려 보이고 태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말라보이니 나 죽을 꿈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점쟁이는 생각 끝에 "능히 열매가 열어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질 때 소리가 없을쏜가,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렸으면 사람마다 우러러볼 것이요, 바다가 마르면 용의 얼굴을 능히 볼 것이요,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것이라"고 꿈을 해석한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꿈에 대한 춘향의 해석에도, 장님의 해석에도 일정한 체계가 있다. 자신의 꿈에서 죽음을 보는 춘향은 그 해석에 상징체계를 적용한 것이지만, 거울의 깨어짐에서 소리를 듣고, 앵두꽃의 낙화를 결실에 연결하고, 문 위에 달린 허수아비에 대해 우러러보는 시선의 방향을 느끼고, 태산의 무너짐에서 평지를 보고, 바닷물이 말라붙은 자리에서 거기 드러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장님의 해석은 사실체계를 기반으로 삼는다. 춘향은 하나의 현상에서 감추어진 뜻을 찾으려 하지만, 이 직업적 점쟁이는 하나의 물질 뒤에 전도되어 있는 또 하나의 물질을 본다. 춘향에게 중요한 것은 말과 사물의 의미이지만, 장님은 꿈속에서 일어난 사건에 담긴 물질적&#8231;사실적 효과를 존중한다.

사실 춘향전에서 춘향의 개성이 압도적인 것은 그녀가 뜻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춘향의 이야기 또는 노래에 '열녀춘향수절가'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도 그녀가 뜻과 의지의 인간이라는 점에 우선 주목한 것이다. 춘향이 생각하는 자신의 운명은 그 뜻을 죽음으로 관철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장님 점쟁이는 한 시대의 한 제도에서 그 주체의 혼란과 변화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지하고 있다. 춘향이 그 제도에서 버려진 자식인 것은 그녀의 신분이 불완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완전한 신분의 양반들이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의 절개를 도덕적 의무로 여기는 데 반해, 춘향은 그 절개를 자신의 권리로 주장해야 하고 주장하기 때문에 한 권력이 감싸 안을 수 없는 자식이 된다. 춘향은 한 원리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장함으로써 그 원리에 담긴 모순을 한 편으로는 고발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보충하게 되는 원리의 인간이지만, 그 죽음의 의지와 은유에서 감성의 변화를 보는 장님은 벌써 역사적 인간이다. 춘향전에서 이 감성의 변화가 수절의 원리를 마침내 사랑의 원리로 바꾸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꿈의 해석은 어사 이몽룡이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 읊는 정치시(금잔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그릇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피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이 또한 높구나)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다. 이몽룡의 시는 사실상 점쟁이로 대표되는 민중적 감성의 변화 위에 내린 행정적 결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도덕률을 강화하려는 사상체계는 어김없이 그 도덕률을 강화한다. 문학은 하나의 도덕률을 강화하려 할 때조차도 자주 그 도덕률의 밑바탕을 뒤흔든다. 문학은 그렇게 주어진 윤리의 바깥으로 빠져나가 그 윤리가 내팽개쳤던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든다. 그것이 문학의 문학다움이며 문학의 숭고함이다. 사람들은 자주 예술의 숭고미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숭고하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것, 인간의 두뇌로는 생각할 수도 없이 깊은 것에 붙이는 우리의 감정을 일컫는 말이다. 거대한 것은 산과 바다만이 아니다. 광화하고 그윽한 것은 저 끝없는 우주와 그 운행의 원리만이 아니다. 사람살이 또한 거대하고 깊은 것이기에 인간의 온갖 제도가 내다버린 바리데기들을 위해 늘 새로운 말이 만들어질 여지를 남긴다. 사람살이는 무한하게 넘실거리며 어제 중요했던 것들의 질서를 오늘 바꾼다. 저 먼 물결의 끝에서 하찮은 것들이 하찮은 신음을 내지른다. 한 세상의 도리를 강구한다는 근엄한 선비 앞에서 갱피 훑는 여자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이다. 열녀의 절개는 기생의 딸 춘향이 넘볼 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저 하찮은 것들의 말이 아니라면 어디서 숭고한 말을 찾을 것인가.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