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에 가렸던 입호 중심 다양한 형태·빛깔 90여점 엄선높이 61cm 대형 꽃항아리로 당당하고 강인한 위엄 '감탄사붉은 무늬 박고 돋을새김 기법, 황홀한 변주도 눈길 못떼게6월말 청화·철화백자 후속展도
한 번만 쓱 둘러보고 나오기가 아쉬워 다시 한 바퀴, 두 바퀴 돌게 된다. 아무 그림도 없는 순백자 항아리가 마음을 흔들 줄이야. 그 빛깔과 형태가 매혹적이다. 같은 흰색이라도 눈처럼 새하얀 것, 따뜻한 우윳빛, 파르스름한 것이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순백의 바탕에 부드러운 그늘이 지면서 자아내는 미묘한 효과는 눈을 떼기 힘들다. 같은 항아리지만 형태도 조금씩 달라 단조롭지 않다.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이 13일 서울 신사동 분관에서 시작하는 '백자호(白磁壺)-너그러운 형태에 담긴 하얀 빛깔'은 조선시대 백자 가운데 순백자 항아리만 모은 전시다. 소장품 중심으로 90여 점을 엄선했다. 대부분 왕실에서 쓰던 최고급품이라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조선 백자 항아리는 형태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다. 전체가 둥글어 '달항아리'로 불리는 원호(圓壺)와, 한껏 부풀어 오른 어깨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며 버티고 선 입호(立壺)가 그것이다. 조선 백자의 백미로 흔히 달항아리를 꼽지만, 이번 전시는 입호를 전면에 내세웠다. 입호의 예술적 가치는 그 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달항아리가 온화한 둥근 맛이라면, 입호는 남성적이고 강건한 멋을 풍긴다. 입호는 대개 덩치가 큰데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입호는 높이가 61㎝다. 왕실 잔치에서 꽃을 꽂거나 술항아리로 쓰던 이 대형 백자는 왕실의 위엄에 걸맞게 당당한 아름다움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큰 백자 항아리는 물레로 한 번에 뽑아낼 수가 없기 때문에 윗짝과 아랫짝을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인다. 자세히 보면 띠를 두른 듯 골이 진 이음매가 있다.
입호만 모은 제1전시실을 지나 2전시실로 가면 각양각색의 순백자 항아리를 볼 수 있다. 달항아리 10여 점을 비롯해 아래가 둥근 떡메병(떡메의 머리 부분을 닮았다), 어깨 근처에 꽃무늬를 살짝 돋을새김한 것, 배 부분을 각 지게 돌려 깎은 것, 선을 파고 붉은 흙을 상감해 무늬를 박은 것,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입혀 푸른 빛이 도는 것 등 백자의 변주가 흥미롭다.
마지막 제3전시실은 조선 초기의 백자 항아리를 선보인다. 세종대왕의 치세로 대표되는 15~16세기는 조선 문화의 최절정기다. 조선 백자의 순백이 이때 완성됐고 형태도 최고에 달했다. 왕이 쓰는 그릇으로 백자를 지정하고, 왕실용 백자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관요가 생기면서 백자가 발달했다. 이 시기 백자의 눈처럼 깨끗한 설백색과 절제된 형태미는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조선 왕조의 미의식과 통한다.
도자기 발달사에서 백자는 청자를 뛰어넘는 첨단 기술로 등장했다. 백자를 빚는 흙은 백토 광맥에서 캐낸 돌을 부수어 곱게 갈고 여러 번 걸러낸 것이라 그만큼 비싸고 귀하다. 청자보다 더 높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제작비도 더 든다. 이런 사정으로 임진왜란 이후로는 좋은 흙을 구하기 힘들어 순도가 떨어지는 회백색 백자가 나왔고 우윳빛 달항아리는 문예부흥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호림박물관은 리움미술관, 간송미술관과 더불어 국내 3대 사립 박물관으로 꼽힌다. 도자기 명품을 많이 소장한 곳으로 유명하고 그림과 고서류 컬렉션도 훌륭하다.
이번 전시는 6월 21일까지 한다. 두 번에 나눠 백자 항아리를 소개하는 특별전의 1부다. 안료를 써서 그림을 그려 넣은 청화(靑華)백자와 철화(鐵畵)백자를 모은 후속 전시(6월 26일~9월 20일)가 예정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가을에 청화백자 특별전을 열 계획이니, 나란히 관람하면 좋겠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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