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지만, 날개가 없는데도 날아오르려 애쓰는 족속이 바로 인간이다. 이상의 소설 의 마지막에서 화신백화점 옥상까지 올라간 주인공이 외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자신이 직접 날지 않더라도, 날아가는 존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예술가들은 왜 하필 이 일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결정적인 계기나 충격적인 전환점을 기대하는 눈빛이 부담스럽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멋진 이야기를 지닌 예술가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지극히 사소한 순간 자신이 예술가임을 자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곳은 야구장이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에 진구구장 외야석에서 타자의 배트가 강속구를 맞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왜 그 소리였을까. 그렇게 맞은 공은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95년 9월, 나는 해군사관학교에서 작문과 해양문학을 가르치는 해군 소위였다. 오전 7시 30분 해안도로를 달리는 출근버스에 몸을 실었다가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무수한 고기떼를 보았다. 날치였다. 그 순간 결심했다. 소설가가 되어야겠어!
그 봄, 야구장에서 날아가는 공을 본 이가 하루키만은 아니다. 그 가을, 버스에서 탄성을 지른 해군은 나 외에도 삼십 명이 족히 넘는다. 공이 저렇듯 장쾌하게 뻗어가니 2루타는 되겠구나! 라거나, 아침에 날치 떼를 봤으니 복권을 사둬야지! 라고 생각한 사람은 있을 법 하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이는 극히 적다.
이 일화들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다. 심오한 의미가 단어 뒤에 숨어 있지 않단 뜻이다. 어떤 광경을 보곤 지금까지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 그게 전부다. 야구공은 야구공이고 날치는 날치다.
이 이야기를 고백할 때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독자 앞에서, 왜 하필 그때였을까 스스로에게 되묻곤 한다. 그날 이후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 그 소설을 품평해준 고마운 이들과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그러나 수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날치 떼를 보지 않았다면,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날아가던 중이란 상황이 주목된다. 야구공이든 날치든, 그 존재는 지상 혹은 수면을 벗어나 허공에 떠 움직이고 있었다. 날짐승처럼 비행하는 찰나를 목도한 것이다. 물론 야구공과 날치 떼가 영원히 날아올라 하늘로 사라지진 않는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야구공은 떨어지고 날치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야구 경기를 구경하거나 날치를 본 이들이 직장으로 돌아가서 일상 업무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움직임은 그 상황을 경험한 이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추락은 불안이요 공포다. 떨어질 것을 알기에 선뜻 두 발을 지상에서 떼지 못한다. 그렇지만 또한 비상은 파괴요 설렘이다. 일상에 갇히지 않고, 단 한 번 짧은 순간만이라도 저 야구공처럼 저 날치처럼 중력을 거스르고 싶은 뜨거운 갈망이다.
화신백화점에 올라간 우리의 주인공은 어찌 되었을까. 날자고 외치기만 하고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왔을까. 아니면 날개도 없는 주제에 두 팔을 활짝 펴고 그 백화점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었을까. 결국 같은 이야기다. 주인공이 '날자!'라고 외치기 전에 '날개야 다시 돋아라'라고 말한 문장을 곱씹곤 한다. 왜 '다시'일까.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겠지만, 혹시 화신백화점 옥상이든 북한산 꼭대기든 도약하고픈 곳에 예전에도 올랐던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날기를 소원했던 것은 아닐까.
일생의 결전을 앞둔 이가 전날 밤 하늘을 우러르는 대목을 만나곤 한다.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똥별에 행운과 덧없음이 양념처럼 얹힌다. 인간의 삶은 별과 땅 사이에 있다. 내일 쓰러져 땅 속에 묻히더라도 오늘 별을 우러르는 족속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
김탁환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