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를 끼고 있는 크림반도는 북쪽 대륙세력이 지중해를 통해 바다로 진출하는 요지다. 흑해에서 이스탄불이 접한 보스포러스 해협을 빠져나가면 마르마라해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서쪽으로 에게해, 지중해로 이어진다. 크림반도는 대륙에서 유럽 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유럽 각국의 해양 교류의 중심인 이 바다로 가는 출발점 같은 곳이다.
크림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은 이 지역이 가진 이런 지정학적 이점 때문이다. 근현대사 속에서 크림반도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드러냈던 대표적인 국가가 러시아다. 수세기 동안 동아시아에서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던 러시아로서는 유럽 진출의 발판이라는 크림반도의 전략적 이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크림반도를 안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근원인 슬라브 국가가 태동한 곳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호기로 삼아 크림반도를 장악한 데에는 이런 정치ㆍ군사적인 배경이이 깔려 있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에 끼인 존재다. 그래서 늘 할큄을 당하기 쉬운 땅이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끼인 크림반도는 과거에는 어떤 갈등의 한가운데 있었을까. 200여년 역사를 되짚어 '키워드'로 크림의 아픈 역사를 알아본다.
핍박 받은 토착민 타타르족(18세기 말)
크림반도를 두고 벌어진 강대국의 충돌은 17세기 초부터 본격으로 시작됐다. 흑해 연안 진출을 목표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는 당시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유럽 오스트리아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던 오스만투르크제국과 크림반도를 경계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러시아는 1차전쟁(1768~1774년)에서 승리하면서 사실상 크림반도 점유권을 갖게 됐다.
이후 러시아의 세력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 스웨덴 등 서구열강이 오스만투르크제국에 가세해 러시아와 2차전쟁(1787~1792년)을 벌였다. 여기서도 러시아가 승리해 1792년 1월 루마니아 북동부 야시에서 체결한 '야시 조약'으로 크림반도 점유권을 공인 받았다.
당시 러시아는 흑해 남쪽의 터키 이스탄불까지 세력을 확장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크림반도 통제력을 높여야 했다. 토착민이던 타타르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갔다. 당시 약 5,000만명이던 타타르 인구는 러시아의 인종말살정책으로 30만명까지 줄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가 최근 크림반도를 장악하자 타타르인들이 반대하며 무력시위까지 벌이려 하는 것도 이런 핍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팅게일의 크림전쟁(19세기 중반)
그로부터 반세기 뒤 크림전쟁은 유라시아 패권을 노리고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러시아가 크림반도와 흑해를 차지하기 위해 충돌한 사건이다. 촉발은 가톨릭과 러시아정교회 간 대립이었다. 1850년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성지에 대한 권리를 두고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는 투르크 정부가 가톨릭의 손을 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러시아가 반발해 1853년 투르크 지배하에 있던 몰도바와 왈라키아로 군대를 출동시키면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영국, 프랑스 등은 투르크와 연합군을 결성해 1854년 6만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크림반도로 공격해 들어갔다. 크림반도 남부의 세바스토폴 항구에는 그때도 러시아 해군의 주력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연합군의 공격을 맞아 11개월간 버티다 못해 자국 함선을 침몰시킨 후 크림반도에서 물러났다. 1856년 프랑스 파리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흑해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내놓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1877년 투르크와 다시 한번 전쟁을 벌여 흑해와 맞붙은 발칸반도는 물론 크림반도까지 그 영향력을 회복했다.
크림전쟁은 간호사 나이팅게일 등 영국 성공회 수녀 간호사들의 활동 무대로도 유명하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크림전쟁에 포병 장교로 참전해 당시 상황을 '세바스토폴 이야기'란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전후 청사진 얄타회담(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수장들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 남쪽 끝에 있는 얄타에 모여 회담을 개최했다. 종전 이후 패전국 처리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서구 열강과 러시아가 유라시아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크림반도에서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역사적 회담이 열린 것이다.
이 회담의 정식명칭은 크림회담이다. 연합국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달랐다. 소련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독일에게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고 폴란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소련의 폴란드 지배를 막아내면서 전리품을 챙기려 했고, 미국은 소련의 확실한 참전을 이끌어내고 종전 후 설립될 국제연합 주뎠?확보에 관심이 컸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뜻대로 됐다. 독일은 분할 점령으로 결론이 났다.
얄타회담은 한반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신탁통치안을 거론했다. '40년 후견'이라는 말을 했다가 '5년'으로 줄였다. 태평양전쟁에서 고전하던 미국은 소련 대일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할린과 일본 북방영토(쿠릴열도)의 소련지배도 인정했다.
흐루시초프와 흑해함대 분쟁(1995년)
어린시절부터 30대 중반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살았던 흐루쇼프 서기장 시절인 1954년 소련 최고회의는 크림반도를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소련 체제가 붕괴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크림반도 소유권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반환을 요구했고, 우크라이나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등 합법적 영유권을 주장하며 맞섰다. 1991년 크림자치공화국이 들어서자 충돌이 완화하는 듯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크림 의회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갈등의 불씨는 여전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크림 분리독립 사태는 20년 전부터 계속된 것이다.
크림반도 영유권 분쟁의 핵심에는 흑해함대 통제권이 놓여 있다. 수세기에 걸친 남하정책을 통해 러시아가 거둔 최대 수확은 크림반도 세바스토폴항의 흑해함대 주둔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흑해함대 통제권을 누가 가질 것인지가 모호해졌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들은 자국 내에 주둔하는 옛 소련군 병력을 발 빠르게 흡수했다. 흑해함대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흑해함대를 차지할 것을 우려해 흑해함대의 최신 항공모함 쿠즈네초프호를 북해 무르만스크항으로 긴급 이동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자국내 옛 소련 지상군부대의 통제권을 차례차례 접수한 우크라이나는 세바스트폴이 자국 영토이므로 흑해함대도 자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두 나라는 1995년 흑해함대 분할 소유에 합의했다. 러시아가 흑해함대의 약 3분의 2를 소유하는 대신 보상으로 우크라이나에 5억2,6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또 러시아 흑해함대는 세바스토폴 기지를 2017년까지 임대해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나가면서 러시아에 비상이 걸렸다. 민중 봉기인 '오렌지 혁명'의 여파로 2005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친서구파 빅토르 유센코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러시아의 불안은 더 커졌다. 유센코는 세바스토폴 항구 임대료를 4배나 올리는 등 러시아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흑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가능한한 위축시키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는 수세기 동안 흑해를 차지하려고 싸워온 러시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2009년 말 취임한 친러시아파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유센코 전 대통령의 노선을 폐기하고 러시아 흑해함대의 세바스트폴 임대를 2042년까지로 연장해주었다. 러시아가 반정부 시위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고국을 등진 야누코비치를 받아준 것도, 여전히 그를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비호해주는 것도, 또 그의 이름을 앞세워 크림반도에 군사개입을 하는 것도 이런 복합적인 사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 보면 크림반도는 어쩌면 예정된 독립의 길을 이제야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군사개입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주민들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면 우크라이나가 그곳을 옥죄고 있어 마땅할 이유도 없다. 오는 30일로 예정된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에서 그 큰 가닥이 나올 것이다.
크림은 누구의 것일까. 영유권을 가진 우크라이나의 것일까, 주민의 60%를 차지하는 러시아의 것일까. 아니면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고 학살과 핍박을 견디며 지금도 인구의 10% 남짓을 차지하는 이슬람계 타타르족의 것일까. 아마도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 모두의 것이 아닐까.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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