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서울 송파 세 모녀의 동반자살은 이 나라의 지옥도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들은 왜 한 많은 세상과 작별하는 마당에 "죄송하다"고 말하며 70만원을 남겼을까. 그런 분들이 도대체 뭐가 죄송했을까.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건 단지 '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집을 얻어 인간됨을 유지하는가.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거나 스스로 벌거나, 그러다 모자라면 돈을 빌린다. 그때그때 벌어 필요한 비용을 대지 못하면 빚쟁이가 되고, 혹 병이나 사고가 생기면 큰 위기에 처한다. 매우 구체적이고 작은 돈, 그리고 '연줄'과 '인정' 등이 우리네 삶을 지배한다. 우리는 생존투쟁 앞에서 보유한 사회자본도 총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가난할수록 위기에 대처하게 하는 정보ㆍ자원은 취약하고 미미해진다. 송파의 세 모녀는 어떤 체면과 양심, 그리고 '아는 사람'들을 갖고 있었을까.
자살은 GDP(국내총생산)나 실업률 같은 막연하고 큰 경제지표가 아니라 이런 구체적이고도 작은 삶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가난해도 돈을 빌릴 데가 있거나, 이자율과 부채 추심 방법이 달라지면 자살률은 낮아질지 모른다. 빚을 졌더라도 조금 더 버틸 수 있다면, 그리고 독촉하며 괴롭히는 압력이 없다면, 또는 빚 때문에 가정불화나 다른 갈등이 추가로 야기되지 않는다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은 총체적인 것이라, 인간됨의 최저선을 지속적으로 맛보게 한다. 그럼에도 만약 희망이 있다면, 아파도 치료받아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금 가난해도 배워서 잘 될 희망이 있으면 죽지 않을 것이다. 60대와 30대였던 세 모녀는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거 같다.
이런 세상에서 이같은 사건이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건 그래도 다행인가? 우리는 마비된 어떤 공통감각을 일깨워받았다. 우선은 그들이 남긴 구체적인 말과 삶의 생생한 흔적 때문이었겠다. 그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평소에는 결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새삼 들려주었다. "죄송합니다"라 자책하면서. 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어쩌면 지난 연말의 '안녕들하십니까'와도 비슷한 결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 삶과 죽음이 가진 보편적인 처절함 때문이겠다. 그들이 남긴 지나치게 꼼꼼한 가계부가 보여주듯, 성실했던 삶이 가난의 고통을 결코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충격받고 슬퍼했다. 사건을 통해 여성빈곤의 현실을 재차 새긴 사람들도 많다. 과연 여성 가장 가정이나 취약계층 비혼ㆍ이혼 여성들은 어떻게 먹고 사나, 그들이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나? 허드렛일 외에 어떤 다른 고용의 가능성이 있나?
우리 사회 같은 정글사회에서는 마치 상수처럼 일정한 수의 약자들이 자살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약자들이 그냥 이 정글의 초식동물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의식적이며, 소통적이고 고결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세 모녀는 다시 가르쳐주었다.
자살자들이나 자살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가 생명을 존중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단지 생명이 아니라 '생 자체를 포함한 제대로 된 삶'이다. 차상위계층이나 40~50대 가장 등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긴급한 위기'에 놓여 있다. 이명박정권 이래 독점자본과 수구세력은 '국민'을 대상으로 수탈과 착취의 '저강도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 같다. 매년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전쟁에서 '타살' 당한다. 대통령은 보좌관이 써준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을 읽었을 뿐이며 유권자가 거기 속은 것이라는 '진실'을 뻔뻔히 말하는 집권당 실세를 보라. '사회적 타살'은 단지 '복지'나 '공약'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총체적인 구조와 양심의 문제와 결부된다. 양심적이었을 그들이 남긴 70만원의 의미가 여기 담긴 듯하다.
죽은 분들을 위한 촛불이, 아니 횃불이 필요한 때 아닌가? 6월에 무슨 선거가 있어 잇속을 챙기느라 벌써 떠들썩하다. 그런 선거 같은 일도 이런 문제와 연관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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