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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5회) 가야금 명인 문재숙씨와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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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5회) 가야금 명인 문재숙씨와 자녀

입력
2014.03.0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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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금으로 마음을 움직여라"말씀에 깨달음 얻고 심기일전

● 또 다른 스승 김명환 선생판소리 고법의 기예능보유자

"살아서 다시 못 만날 명고수" 작고하기 2년전에 함께 녹음

● 가야금 합주단 예가회성서 구절을 다듬은 곡 만들어

국악 선율로 찬송하는 실내악단전국의 가난한 교회서 순회 연주

30여 년 전쯤, 알게 모르게 클래식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 기자가 동시에 나름 열을 올렸던 것이 LP 수집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성음음반사에서 나온 '김죽파 가야금 산조'는(사진)그 무렵 성금연의 가야금 앨범과 함께 구해 두고 종종 비교해 가며 듣던 앨범이다. 날렵한 추녀끝 곡선 같은 성금연의 가야금과 쌍벽을 이룬 김죽파의 그것은 질박미가 씹을수록 일품이었다.

가야금 주자 문재숙씨를 만나기 전, 기자는 김죽파의 직계 제자와 말을 나눈다는 나름의 기대에 차 있었다. 이왕이면 그 물건을 다시 꺼내 들고 가 서명이나 받아두자는 심산이었다. 막상 댁내로 들어서서 곳곳을 장식하는 달필의 붓글씨가 바로 그 음반의 제자(題字)라는 뜻밖의 사실을 알고 놀랐고, 예술의 정점에 오른 뒤 맞닥뜨린 고통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 탄복했다. 어엿이 자라난 자식들이 그 세월에 대한 보상일까.

큰 딸 이슬기(34)씨가 지난해 발표한 음반 '그리고 그리다Ⅱ'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가 꿈꿔온 미래였는지도 모른다. 고도로 정제된 음악 양식인 여창 가곡 '우락'을 자신의 가야금 연주에 맞춰 들려 주더니, 현악 4중주나 비브라폰 등 양악과의 협연으로 우리 시조를 노래한다. 국악이 걸어갈 미래상의 일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인 이화여대 국악과 문재숙(61)교수의 음악적 행로를 연장하면 나타날 길이다. 자신의 다양한 음악적 행보를 종합한 앨범 '첫사랑'의 해설서는 문 교수를 가리켜 "김죽파의 유일한 적자"라 적시한다. 이슬기는 이수자. 모녀는 가야금 유파의 굵은 맥을 이루고 있는 김죽파류 산조의 현재상이다.

그 CD 세트에는 문 교수가 현재 딸과 꼭 같은 나이인 34세, 1987년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김명환과 만들어 둔 녹취분이 전바탕 수록돼 있다. 김명환이 작고하기 2년 전이었다. "살아서는 다시 못 만날 명고수라는 확신에 노장을 모셔 이뤄낸 일이에요."자신이 펼쳐 온 다양한 음악적 행보 중 전통 쪽에 초점을 맞춰 낸 회갑 기념 음반 '첫사랑'을 두고 그가 하는 말이다.

김죽파의 음반은 녹음 당시 장단 별로 따로 녹음해서 나중에 하나로 이어 붙인, 당시로서는 하이테크 기술이 적용된 야심작이었다. 그 음반을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죽파류는 김죽파, 최옥삼, 김병호, 강태홍류 등 김창조 계열의 산조다. "날렵한 가락의 재미로 아기자기한 성금연류가 맛깔스러운 불고기라면 깊은 농현의 죽파류는 곰국에 비견될 수 있어요." 산조 양식을 완성한 김창조의 틀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격(格)이 있는 산조다. 죽파의 산조는 풍류의 담백하고 고졸스런 분위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푹 고아낸 곰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해서 덜 대중적이다. 민속악 특유의 흥과 즉흥적 신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대한 스승 두 분을 모시게 된 젊은 날의 문재숙은 궁금한 게 있으면 묻고 또 물었다. 죽파는 "내게서 기름을 짜 간다"며 엄살을 떨었다. 김명환은 "뭐든 물어보라"며 귀여워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라며 문 교수가 당시의 자신에 든 비유에는 젊은 날의 열정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일고수이명창이라는 판소리의 이상을 악기로서 완벽히 실현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당대 소리의 버디라고 불리운 김명환이 함동정월의 산조를 좋아했던 반면, 김소희는 죽파의 것을 매우 좋아했다 한다. 그는 "죽파가 예모(藝母)라면 김명환은 예부(藝父)"라고 요약했다. 산조가 사설 없는 판소리라면 판소리는 민속악의 바다다. 젊은 시절,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들을 수만 있다면 접했을 만큼 죽파의 산조는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시간 강사로 13년을 보내고, 교수로 20년째 있다. 원래 서울대 국악과 72학번인 그는 김정자 교수에게서 정악을 중심으로 4년을 수학한 뒤,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있던 가야금 주자 황병기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혼을 사로잡았던 것은 민속악,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그마한 체구였으나 사람을 꿰뚫을 듯 강렬한 눈빛"의 죽파가 펼쳐 보인 세계였다.

"3학년 때 김 교수의 소개로 연이 닿은 죽파의 사직 공원 옆 자택에서 배웠어요." 초면의 문재숙을 아무 말 없이 보던 죽파는 다짜고짜 사직동 집으로 데려갔다. "작은 한옥인데 난이 아주 많았죠."

대학원 졸업 후 데뷔 독주회를 하고 나니 선생은 전화를 걸어 "공부 계속 하면 성공할 텐데 왜 안 오느냐"고 다그치듯 묻는 것이었다. "성공이란 가야금으로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라며. 그렇게 인연이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전혀 다른 산조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함동정월이나 성금연에게서 배우려고 나름 스케줄을 잡아 두고 있던 그는 막상 죽파에게서 배워 가다 보니 귀가 열렸다. 건성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성음(成音) 등 기본적 문제가 실제로는 얼마나 큰 차이를 내는가 깊이 깨닫게 됐다. 특히 매우 느린 장단 정도로만 이해한 진양조의 깊고, 섬세한 맛을 처음으로 체감한 그는 저간의 얕은 이해에 절망했다. 그고 심기일전했다.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문화재 지정 이유가 악보 채보에 힘써 김죽파류에 가까운 가락을 복원했다는 것이었으니 당시 작업은 훗날을 대비한 것이었던 셈이다.

"산조를 모르는 사람들은 오뉴월에 타던 가락, 동짓달까지 탄다는 비아냥도 하지만 산조는 끊임없이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즐기는 음악이에요."산조가 그렇게 역동적인 양식의 예술이라면 원형 보존이라는 인간문화재의 취지와 상충되지는 않을까? "눈에 띄는 것은 전통대로 전승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새 것을 추구해요."듣고 보니 일견 상충되기까지 하는 두 명제의 균형을 맞추는 게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다. "천만에, 그게 재미죠."

그는 "죽파가 칠순 넘겨 새 창작곡을 쏟아냈듯, 세종대왕이 생의 후반부에 '여민락' 등 걸작을 내놨듯, 삶의 신산을 다 겪고서도 이어지는 창작에의 열정이 진짜"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인다. "나는 다복하잖아, 절대 고독이 없잖아?"그러나 그가 서양의 종교에 최종적으로 안착하기까지는 내면적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이른바 모태 신앙이 아니다. 어려서 간 교회는 학용품 받는 재미였을 뿐이었다. 종교에 관심 많았던 그는 대학 때는 학생기독교협회, 불경연구회 등을 두루 다녔다. 결혼해서는 마하바라밀다심경 289자를 써서 부모님께 선물로 줄 정도였다. 부친이 불교신도협회 회장이었던 만큼 글씨 연습을 하고 엄청나게 생긴 파지를 냇가에 가서 태울 때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기독교, 모친은 천주교도가 됐으니 한국 특유의 종교 다원주의를 표상하는 가족이 된 셈이다.

"우리 전통 음악은 유불선, 특히 샤머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다. 신명과 접신이 최고의 경지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을 떼 최고의 연주가 나온다." 1988년 늦게 얻은 아들이 잔병 치레가 많아 아들을 위해 가야금 찬양을 시작한 것이 실제 동기였다.

1990년 그가 펼친 제 1회 가야금 찬양의 밤은 종교음악사적 사건이다. 그해 찬송을 목적으로 만든 가야금 합주단 예가회는 음악사적으로는 단일 악기로 만들어진 최초의 실내악단으로 기록된다. 성서 구절을 다듬어 시를 얹히고 국악 선율을 붙인 곡을 계속 만들어 전국 순회 연주 등을 펼쳐 나갔다. 자신의 제자들로 구성된 20~30대의 가야금 주자들이 병창으로 펼치는 찬양이었다. 2006년 문화재로 지정 받으면서 이어 오는 시리즈 콘서트 '동행'은 죽파류 산조의 법통을 잇는 자리면서도 가야금을 통해 국악과 기독교가 융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예배 전체를 국악으로 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신념이지만 기존 교회가 국악적 장단 등 국악에 대해 갖는 이질감이 커요. 저희의 과제겠죠."

자식들은 서너 살부터 어머니의 가야금을 갖고 놀았다. 어머니가 지은 찬양곡으로 함께 가야금 병창도 해 왔다. 시리즈 콘서트 '동행' 등 기회 있을 대마다 그들이 펼쳐 온 것은 죽파류 산조는 물론 국악 찬양이었다. 이들은 어떤 문화사적 의무를 느끼는 듯 했다. "빈익빈부익부의 한국 교회상에서 벗어나야죠. 저희는 가난한 교회나 지방 교회의 초청에는 빠지지 않으려 노력해요." 콘서트가 없으면 두 세 달에 한 번 꼴.

문재숙씨의 음악적 고갱이는 첫째 딸 이슬기씨에게로 고스란히 전승, 확장되고 있다. 이화여대 등 국악과에 출강하는 딸은 김죽파류 산조를 테마로 한 '현의 노래'를 비롯해 5장의 CD를 발표했다. 2005년부터 해오고 있는 '이슬기 가야금 독주회'는 정통 산조는 물론 학구적인 것과 대중적 퓨전을 섞어가며 짜고 있는 판이다. "앞으로 사랑 등의 주제를 갖고 하나의 서사에 녹이는 스토리 콘서트를 생각하고 있어요."

서울대 국악과 출신으로 역시 가야금 주자인 둘째 딸 하늬(30)씨는 요즘 숨가쁜 방송 스케줄로 2006년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들인 대금 주자 이권형(26)씨는 추계예술대학에서 원장현류의 산조를 공부하고 있다. 국정원 제 2차장으로 있다 2000년 퇴임한 남편 이상업(67)씨는 아내와 자식들의 영원한 후원자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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