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윤리위원회 사전심의는 1996년 위헌 판결로 사라졌지만'납본필증' 사라진 곳엔 '등급'이…성 표현·흡연 장면 등 블러링 처리"시대착오적" 비판받는 상황에도 퍼스널 미디어에까지 심의잣대 창조적 상상력 무차별로 억압
대한민국에서 창작물 사전심의라는 이름의 '검열'이 사라진 게 1996년이다. 그 해 10월 헌법재판소는 옛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영화 사전심의 권한을 규정한 '영화법' 제12조 등이 헌법상의 검열금지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앞서 영화집단 '장산곶매'대표를 맡고 있던 음악평론가 강헌 씨는 92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련 영화인 를 제작해 사전심의를 안 받고 상영한 뒤 영화 사전심의제도의 위헌심판을 법원에 청구했다. 헌재는 영화에 이어 음반 사전심의에 대해서도 위헌 판결했다. 영화 음반에 대한 검열은 그렇게 '제도적으로' 끝이 났고, 공륜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강헌씨는 "그 전에는 창작물을 공륜에 먼저 제출해 문화부장관의 인증서인 '납본필증'을 받아야만 음반도 찍고 극장에 걸 수 있었다. 완벽한 검열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납본필증이 사라진 자리에는 등급분류가 등장했고, 공륜은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 대체됐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는 영등위의 심사를 통해 △전체 △12세 이상 △15세 이상 △18세 미만 △제한상영가 등급으로 판별된다. 강헌 씨는 "영화 심의는 권력의 감시 통제 메커니즘이 직접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에서 간접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바뀌었음을 전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덜 제한적 등급을 받아야 넓은 시장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창작 단계에서부터 내재화시킨 것이다. 검열의 시선 속에서 창조적 상상력은 억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틀 곳 없는데 존재하는 제한상영가 등급
상영할 극장이 없는 한국 현실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은 사실상의 상영불가 판정이어서 '검열'의 잔재라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헌재는 2008년 제한상영가 등급 기준 등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결정 방식에 대해서만 '헌법 불합치'판결했다. 형제 영화감독인 김곡, 김선씨의 영화 (2010)는 경찰의 상징인 포돌이 인형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이명박 정권 당시 벌어진 사회적인 사건들을 풍자한 영화다. 영등위는 이 영화에 대해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을 내렸다. 법원은 1심과 항소심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고 영등위는 상고를 검토 중이다. 김선 감독은 "일본에서는 극장 자체등급으로 중고생 관람가로 개봉한 영화다. 영등위의 사유서에는 '정치인을 살인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문장도 있더라. 한국의 제한상영가 등급은 사실상의 검열이다"라고 말했다.
강헌씨의 말처럼, 한국의 문화 심의 권력은 과거보다 부드러워졌지만, 훨씬 집요하고 광범위하게, 미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영화와 가요 외에도 방송과 뮤직비디오 만화 인터넷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심의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선정성과 폭력성, 범죄 및 약물, 부적절한 언어, 사행행위 등 심의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헌재의 판단처럼, 심의 기준이 모호해 일관성이 없는 데다 지나치게 경직적이어서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율규제와 민간 심의 시스템하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는 곳은 2008년 설립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심의위)다. 방송과 인터넷 콘텐츠를 포괄적으로 심의하는 이 단체의 통신소위 위원 5명은 매주 2차례 최대 4,000건에 가까운 인터넷 콘텐츠를 심의한다. 2008년 5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53,935건의 통신심의가 진행됐는데 이중 43,275건이 피해자나 행정기관이 심의를 신청한 것이었다. 통신소위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컨텐츠에 대해 정보서비스 제공 업체에 시정을 요구하는데, 준수율은 사실상 100%다. 시정요구 접수 15일 이내에 이의신청은 가능하지만, 콘텐츠 생산자가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현행법상 이의신청 사실 자체를 통보 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방통심의위가 블로그 업체에 시정요구를 하면, 해당 업체는 게시자인 나에게 알리지 않고 글을 삭제할 수 있다.
통신심의 중에서는 불법정보 심의가 가장 많은데, 불법정보에는 사행심 조장, 음란물, 사회질서위반, 명예훼손 등 권리침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이 포함된다. 사회질서 위반이나 명예훼손, 국가보안법 위반 등은 항상 권력이 개입할 수 있는 심의 항목이다. 통신심의는 표현의 자유 논란을 끊임없이 불러왔다. 통신소위는 트위터 ID '2MB18nomA'의 계정을 '대통령에 대한 욕설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차단했으며(2011), 2012년에는 23개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사전 지정했다. 2011년에는 방통심의위 심의위원이기도 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가 자신의 블로그에 남성 성기 사진을 게재하며 '성적 서사가 없는 성기 사진이 음란물인가'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폭력에는 둔감, 성(性) 표현에는 엄격
심의에는 그 나라의 문화적 감수성이 반영된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한국은 성에는
엄격하고 폭력에는 둔감한 나라"라며 "영화제에 나가면 외국 영화 관계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센' 영화들이 받는 등급 문제"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15세 이상 관람가였던 가 미국에서는 부모나 어른을 동반해야만 17세 이하가 관람 가능한 R등급을 받은 것도 자극적인 폭력성과 마약 때문이었다. 성적 표현에 대한 엄격한 잣대 안에도 얄궂은 눈금 차가 존재한다. 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의 '차별'이다. 지난 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탄 의 국내 개봉 전 영화 관계자들의 관심은 12분 동안 이어지는 두 여성의 적나라한 섹스 장면에 대한 심의 결과였다. 다수의 예상과 달리 영화는 가위질도 없이 청소년관람불가로 영화는 개봉했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칼럼에서 "한국 검열 의식은 철저하게 남성 성기 공포증에 바탕을 둔다"며 "발기한 남성 성기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며 에서 드니 라방이 끼고 나왔던 가짜 고무 성기가 국내 상영 때 안개 속으로 사라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방송사들이 흡연 장면을 뿌옇게 처리(blurring-out)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KBS와 SBS는 2002년, MBC도 2004년 드라마에서 흡연장면 금지를 선언했다. 방송심의 규정이 흡연 장면을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 건강과 청소년 보호'를 내세운 시민단체 등의 거센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한발 더 나가 '드라마에서 음주 장면이 과도하게 삽입되고 있다'며 방송사들의 자율규제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어, 조만간 TV에서 음주 장면도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지난 달 19일 방영된 MBC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가 르네상스 시대 화가 보티첼리의 명화 '비너스의 탄생'가슴 부분을 블러링해 내보낸 데 대해 MBC 심의실측은 "(프로그램 방송 시간이) 청소년 시청보호 시간대여서 시비 소지가 있다는 심의 의견을 제작진에 전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에서 정한 19세 미만 청소년시청보호시간대는 07시부터 09시, 13시부터 22시까지이며, 토요일과 공휴일, 방학은 07시부터 22시까지다. 영국 BBC방송국의 드라마 '셜록' 더빙판을 시청하며 잦은 '블러링'에 짜증이 났다는 직장인 이모(29)씨는 "흡연 욕구를 자극한다고 흡연 장면을 지워야 한다면 도둑질 주먹질 강간 살인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도 다 없애야 하는 것 아니냐. 도대체 언제까지 이 시대착오적인 '검열'을 견뎌야 하는 거냐"고 말했다.
1인 미디어 시대의 낡은 규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가 큰 인기를 끌자 그 해 12월 방통심의위는 뉴미디어정보심의팀을 신설했다. 당시 방통심의위는 팟캐스트 심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마트폰 앱 장터를 하나의 채널, 각각의 앱을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으며, 앱 장터에서 앱을 배열하는 행위는 편성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며 방송법을 개정해 심의하겠다는 논리를 폈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과거 유통채널이 하나이던 시절 생산자만 봉쇄하면 끝났지만, 지금은 퍼스널 미디어의 시대로 모두가 유통 채널을 가지고 있다"며 "그걸 모두 통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옹호하는 국제 비정부기구인 프리덤하우스는 2013년 한국의 인터넷 환경을 '부분적 자유'로 분류했고, 국경없는 기자회는 2010년 보고서 '인터넷의 적들'에서 한국의 검열 수준을 이집트 태국 러시아와 같은 등급으로 평가했다. 지난 10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이 인터넷 공룡인 진짜 이유'라는 기사에서 방통심의위의 인터넷 콘텐츠 삭제ㆍ차단 실적(?) 등을 소개하며 '한국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를 누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아직 허락 받지 못했다'고 썼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