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삶에서 여러 걸음 물러나 중립적이고 무관심하기에…이방인의 삶은 유리처럼 순수남들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능력이자 권리이기도
세상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이 살아가던 뫼르소는 햇볕이 따갑게 내려쪼이던 어느 날, 알제리의 바닷가에서 공연한 싸움에 말려들어 어쩌다 지니고 있던 권총으로 아랍인 한 사람을 쏘아 죽인다. 수사검사는 이 우발적인 살인을 의도적인 살인으로 만들기 위해 특별한 뜻이 없었던 뫼르소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갖 해석과 논리를 들이댄다. 뫼르소는 검사와 변호사와 신부와 기자들과 배심원들로 대표되는 세상 전체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해서 극악무도한 패륜아로 만들기 위해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침내 세상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자기에게 선고된 사형의 집행을 기다린다.
뫼르소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1942)의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그 이방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에트랑제'는 보통 외국인을 뜻하지만, 제 나라에서도 딴 나라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 습속과 제도를 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변의 사정에서도 여러 걸음 물러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카뮈가 이 말로 뜻하려 했던 것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한국의 한 카뮈 전공자가 이 소설을 '이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주인공의 '비범한' 성격을 그 말이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로서는 전문가와 토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이 번역이 불편하다. 몸 붙이고 살던 동네 이름이 갑자기 바뀌어버린 것 같은 느낌도 느낌이려니와, '이방인'이라는 말로도 그 '비범함'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옛 설화에서도 하늘의 사자를 비롯한 비범한 존재들은 자주 먼 나라에서 온 나그네의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이방인'이라는 말을 한 작품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카뮈가 처음은 아니었다. 보들레르는 카뮈가 '이방인'을 발표하기 80년 전에 그의 산문시집을 준비하면서 첫 시에 바로 이 제목을 달았다.
자네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말해보게.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
-나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습니다.
-친구들은?
-당신은 이 날까지도 나에게 그 의미가 미지로 남아 있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자리 잡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미인은?
-그야 기꺼이 사랑하겠지요, 불멸의 여신이라면.
-황금은?
-당신이 신을 증오하듯 나는 황금을 증오합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대관절 무엇을 사랑하는가, 이 별난 이방인아?
-구름을 사랑하지요...흘러가는 구름을...저기...저...신기한 구름을!
한 사람은 묻고 한 사람은 대답한다. 질문자는 누구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하나쯤은 의지해야 할 것들을 열거하며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다. 그러나 대답은 늘 그의 기대를 벗어난다. 질문자는 가족과 친구들에 이어 조국을 언급한다. 상대방은 자기 조국이 "어느 위도 아래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대답하는데, 이는 자기에게 조국이란 태어난 땅이나 핏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뜻을 담고 있겠다. 그의 조국은 그가 바라는 어떤 것이 진정으로 실현되었거나 실현될 수 있는 땅이겠지만 그곳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질문자는 '미인'을 언급한다. 대답하는 사람이 기꺼이 사랑하겠다는 '불멸의 여신'은 아름다움의 이상을 영원히 실현하고 있는 존재일 터이니 인간의 여성으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의 대답은 세상의 여자들이 저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덧없고 허약하게만 구현하고 있을뿐더러 배반하기까지 한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방인은 질문자의 신에 대한 증오를 자신의 황금에 대한 증오와 대등하게 다룬다. 그렇다고 그가 종교에 특별한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방인은 신에 대한 질문자의 증오를 말하고 있을 뿐 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자가 신으로 표현되는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을 증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이 황금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삶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속의 모든 가치관이 사실상 돈에 지배되고 있는 정황은 이 이상야릇한 사람에게 세속의 삶에 등을 돌리게 하는 실제적인 원인일 수 있겠다. 이방인은 마침내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구름은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구름은 온갖 모습을 다 짓지만 흘러가는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구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형용사 '신기한'은 이 구름에 특별한 품위를 주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이 세상과 이 세상 밖을 연통하는 전령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대화자의 어조에 있다. 시에서 두 사람의 어조는 같지 않다. 질문하는 사람은 너나들이를 하지만, 이방인에 해당하는 다른 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존대어를 쓸 뿐만 아니라 문어체에 가까운 말로 깎듯이 응수한다. 너나들이는 친근감을 표시하는 회유의 언어로 일정한 문화와 제도의 습속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끈끈한 감정이 거기 서려 있다. 이방인의 정중한 문어체는 그 감정에 중립적일 뿐만 아니라 그 습속 자체에 완전히 무관심하기에 투명한 유리와도 같은 순수성을 지닌다. 문어체로 말한다는 것은 보편어법으로 말하는 것이고, 구어체로 말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어법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이렇듯 보편어법이 가장 특수한 사안을 말할 때도 있다. 남들이 특수어법으로 말할 때 보편어법으로 말하고, 남들이 보편어법으로 말할 때 특수어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능력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린다면 저 이방인을 간첩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버스 요금을 몰라도, 담배 값을 몰라도, 안방극장의 탤런트 이름을 몰라도 간첩이라고 부르던 시대를 우리는 참 오래 살아왔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휩쓸려 자기 안에 자기라고 여겨야 할 것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그렇게 길었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고개만 한 번 돌리면 저 우람한 제도와 탄탄한 습속이, 그 깊은 감정의 유대가 벌거벗은 임금님의 허망한 비단옷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 유치원의 입학식 날 보모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유치원의 생활지침을 알려주면서, "화장실에 가고 싶은 사람은 오른손을 드세요"라고 말했다. 한 아이가 물었다. "그러면 안 마려워요?" 아이는 이제 자기가 갈수록 까다롭고 복잡해질 한 제도에 첫걸음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 아이의 질문에 어른들은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줌이 마려우면 곧바로 화장실로 가는 대신 오른손을 들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코미디가 아닌가. 우리는 물론 제도와 문화에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진지하게 붙들고 있는 일도 그 한 끝은 희극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의식의 자유를 연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저 이방인의 구름이 신기한 것은 그 구름이 이 세상 밖에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내 개인사에 해당하는 이야기 하나를 적겠다. 대학생 때의 이야기다. 야간 통금이 있던 시대다. 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내려가 있던 나는 무슨 일로 밤길을 걷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 끌려갔다.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고 있던 경찰이 대학생이냐고 묻고 무슨 과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불문과 학생입니다." 내 대답에 경찰이 호통을 쳤다. "얌마, 젊은 놈이 중이 되려고 대학을 다녀." 불문과를 불교학과로 오해한 것이다. 그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경찰은 호통은 그렇게 쳤어도 나를 예비성직자 정도로 생각했던지 훈계도 하지 않고 풀어 주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내가 세상의 이해를 얻기 힘든 일에 몸을 바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나는 딴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고개를 들었지만 밤하늘이라 신기한 구름은 볼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꿈에 시를 한 편 썼다. 꿈 속에서 걸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첫 구절밖에는 기억할 수 없었다. "모기를 씹으니 타관사람 피 냄새가 난다." 내 곁으로 이방인이 지나갔고 모기가 그 피를 빨았었나 보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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