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창칼로 무장한 골리앗에 맞선 왜소한 다윗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우리 사회의 교육 환경을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용산 화상경마장 입점을 반대하는 대책회의가 열린 지 300일째인 25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로 잘 알려진 서울 용산구 성심여고에서 만난 김율옥(51) 교장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개학 준비에 바쁜 봄방학 기간이지만 김 교장은 이날도 마사회 건물 앞 천막 농성장을 찾았다. 교육자이면서 수녀인 그가 생경한 집회에 나서고 농성까지 하게 된 것은 마사회가 성심여중고에서 불과 235m 떨어진 곳에 화상경마장 이전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교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멋진 건물에 화상경마장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지난해 4월. 김 교장은 20여년 전 같은 자리에 있던 옛 화상경마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풍기던 절망과 죽음의 기운에 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화상경마장이 용산역으로 옮겼다가 번듯한 고층 건물을 지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한 남자들의 분노와 짜증, 경마 정보지를 길바닥에 집어 던지며 욕설을 내뱉고, 술에 취해 싸움박질하고…. 그 암울한 모습들에 피어나는 꽃 같은 10대 여중고생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겹쳐지자 참을 수 없었다.
김 교장은 "아이들에게 옳은 것을 실천하고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면서 학교 교실에서 빤히 보이는 한탕주의의 상징인 도박장을 그냥 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역 이기주의인 님비로 비쳐질까 걱정도 들었고 주변에서도 만류했지만, 김 교장은 아이들 걱정에 집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학부모들에게 화상경마장 입점을 알리는 가정통신문을 보내고, 용산구 내 성당과 학교들을 찾는 등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7만여명에게서 화상경마장 입점 반대서명을 받아 지난해 10월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22일 시작한 천막농성은 이날로 35일째를 맞았다.
김 교장은 "전국 곳곳에 설치된 화상경마장 주변 지역사회는 도박 중독이 만연해 가정이 파괴되고 경제도 무너졌다"며 "화상경마장은 도박의 문제를 넘어 사행이 산업일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던지게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화상경마장 같은 중독성 높은 도박 시설을 미국 라스베이거스처럼 주민들의 생활권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300일을 버텨 왔다는 김 교장은 "이 싸움이 교육 환경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화상경마장에 인접한 성심여중고의 교육 여건 문제만이 아니라 학교와 지역사회가 청소년들에게 더 안전하고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장은 서울시와 용산구청의 다른 지역 이전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고집하고 있는 현명관 한국마사회장에 전하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비린내 나는 생선은 아무리 잘 포장해도 결국 비린내가 날 수 밖에 없죠. 공기업인 마사회의 이미지가 좋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경마장 입점을 접고 이 시설이 청소년을 위한 문화시설로 사용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빨리 사태가 해결돼 학생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교장 수녀로 돌아가고 싶다"며 다시 농성장으로 향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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