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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죽음을 긍정하니 남은 시간이 새로운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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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죽음을 긍정하니 남은 시간이 새로운 기쁨입니다

입력
2014.02.2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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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소리가 있을까. 심해의 고요일까, 천상의 하모니 같을까. 산 자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대니 보이'김종수(71)씨에게 그 소리는 1970년대 서울의 호텔 나이트클럽을 주름잡던 전성기 자신의 색소폰 선율처럼 농밀한 것일지 모른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이 그러했다.

17일 경기 광주시 평강호스피스에서 만난 김씨는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고 했다. 중증 뇌졸중에 고혈압 당뇨 합병증. 보건소에서 타 먹는 약과 호스피스의 보살핌이 김씨가 받는 치료의 전부. 하지만 그의 표정은 편해 보였다.

한국전쟁 때 고향 개성을 떠나 월남한 김씨는 고교시절 익힌 색소폰 하나로 한때 서울의 나이트클럽을 주름잡던 연주자였다. "70년대 서울 충무로 대연각 호텔서부터 유명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나 모르면 간첩이었어요. 실 오스틴의 '대니 보이(Danny boy)'를 나보다 더 멋지게 부는 연주자는 없었죠."

매일 밤 양주를 병째 들이켜대며 "잘 나가던"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건 89년, 말 그대로 한창때였다.

왼쪽 몸이 마비되고, 사업도 실패하고, 이혼하고, 하나뿐인 아들(31)과도 연락이 끊기고, 자식 같던 악기도 처분하고…. 그에게 남은 건 회복 불능의 병든 육신과 깊은 우울증뿐이었다. 한 지인은 "그야말로 폐인이었어요. 죽을 날만 기다리는…"이라 말했다.

김씨의 삶은 지난해 2월 전기를 맞는다. 보건소가 소개한 평강호스피스 덕분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김씨를 보살피며 말벗이 되어 주었다. 죽음을 긍정한다는 게 뭔지도 조금씩 알게 됐다. 그것은 처연한 냉소나 자포자기의 기다림이 아니었다. 남은 시간이 새로운 기쁨의 기회라는 것, 마지막이라 더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다시 악기를 쥐었다. 얼마 전부터는 교회 청소년들에게 기타를 가르친다. "왼손이 온전하진 않지만 리듬은 맞출 수 있어요." 음악 얘기를 하는 동안 그의 반쪽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들과도 좋아졌어요. 노력하니 닫힌 마음이 열리더군요."

"마지막 바람? 한번만 더 색소폰을 불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웃었다. 이제 마우스피스를 물 힘도 불 힘도 없다는 걸, 안다는 의미였다. 여한 없음을, 이미 죽음을 긍정하고 있음을,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홀가분해 보였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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