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알레고리, 즉 우의(寓意)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인가. 그것은 언어기술자로서의 소설가가 근본적으로 맞부딪치는 실존적 고뇌일 수 있겠고, 말의 독성함량이 점차 높아져가는 세태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퇴보의 시대를 향한 젊은 소설가의 문학적 저항일 수도 있다. 아니, 이 모든 층위를 아우르며'언어란 무엇인가'란 근본적 질문을 통해'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하는 서사적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생소한 이름의 젊은 작가들이 각양각색의 개성으로 새 봄의 각축을 하고 있는 가운데, 정용준(33)의 첫 장편소설 은 지적인 사유와 야심만만한 서사적 스케일이 돋보인다. 2011년 첫 소설집 이후 처음 선보이는 이 장편소설은 다의적인 해석을 요하는 지적인 소설이자 'SF 우화'의 형식 속에서도 독자와의 높은 정서적 밀착력을 유지하는 서정적 소설이다. 이야기는 매끄럽고 흥미로우며, 소설 속 인물이 겪는 아픔과 고통은 묵시록의 가상세계에서도 허황하지 않고 선연하다.
성서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은 아름다운 동화 한편을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얼음의 나라 아이라'라는 제목의 이 동화에서 호수의 나라 '리르'의 왕은 전설과 풍문으로만 존재하는 아이라의 아름다운 여왕을 흠모해 용맹한 사냥꾼 편에 연서를 보낸다. 사냥꾼은 고난 끝에 아이라에 도착해 편지를 전달하지만, 그곳에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말만이 존재하며,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뱉는 말은 얼음이 되고, 그 얼음을 녹이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말 때문에 아이라의 사람들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여왕은 리르의 왕에 화답해 얼음편지를 사냥꾼 편에 보내지만, 리르의 왕은 얼음덩어리를 해독하지 못한다. 분노한 왕은 사냥꾼을 추방하고, 사냥꾼은 다시 아이라를 찾아 나선다.
이 매혹적인 동화에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매혹된 말더듬이 소년 '노아'가 훗날 천재적 언어생물학자가 돼'말'이라는 음성적 현상을 유기물로 변환하는 실험에 성공하면서 대재앙의 종말서사는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어느 날 사람들의 말은 시취보다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아메바 형태의 거대한 혹덩어리, 펠릿(pellet)으로 뒤바뀌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내뱉는 족족 펠릿으로 변해 마침내 자신을 질식시키는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성대를 제거하고 혀를 자른다. 화자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색깔과 질감이 달라지는 펠릿은"외부로 드러난 마음이었고 밝히기 싫은 비밀이자 추문"이었다. 아비규환 속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이 새로운 시대는 자연스럽게 '바벨'로 호명된다.
사람들은 필담으로 가까스로 소통하며, 필담 전자장치인 팜패드를 이용한다. 하지만 말이라는 근원적 욕구의 억압에도 계급의 차이가 있으며, 진영의 분열이 있다. 정부가 신체에서 제거한 펠릿을 버릴 수 있는 용량에 제한을 둠에 따라 돈을 받고 대신 말을 해주는 최하층민들의 직업'스피커'가 생겨나고,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 언어를 인간에게서 소거한 닥터 노아에 찬동하는'레인보'와 언어를 억압한 노아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NOT'가 맞선다.
닥터 노아와 그를 지원한 정부에 비판적인 잡지 '횃불'의 기자 요나가 소설의 주인공이자 초점화자지만, 그에게는 영웅적 면모랄 게 없다. 노래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자꾸 잠꼬대로 노래를 부르다가 스스로 혀를 자르고, 정부군은 폭력시위에 나선 NOT 진압과 함께 시위선동 혐의로 횃불의 편집진을 체포하며, 어린 동생 룸은 정신병원에 끌려간 채 소식이 없다. 요나는 이 모든 상황 앞에 무력하지만, 되레 그 무력함으로 소설에 핍진한 실감을 불어넣는다. 그의 고통, 절망, 슬픔, 공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으로 인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이되는 것이다.
이 암울한 소설은 당황스러울 만큼 허무한 파국을 맞으며 역사의 한밤으로 진입하지만, 소설에는 서사를 관통하는, 가까스로 유지되는 어떤 온기 같은 것이 있다. 바벨에 대한 상반된 의견으로 대치하며 만나 끝내 사랑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 요나와 마리의 더해진 체온이다. 이 둘이 상대에게 빗장을 푸는 계기는 서로의 글에서 '공통감각'이라는 단어와 마주쳤을 때였다. 사랑은 공통감각의 영토를 차츰 확대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서 공통감각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이제는 남루해진 소통이라는 말이 아이라 왕국의 얼음처럼 녹아내려 봄날의 새처럼 새롭게 지저귈 수 있을까.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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