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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칼럼/2월 22일] "올림픽은 핑계였을 뿐"

입력
2014.02.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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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가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러시아의 소트니코바가 쇼트프로그램에서 불과 0.28점 차로 김연아에 이어 2위를 했을 때부터 그런 우려를 하게 됐다. 결과는 걱정한 대로였고, 심판들의 판정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심판 중 한 명은 1998년 나가노(長野) 동계올림픽 때 판정을 조작하려다 1년 자격 정지를 받은 사람이며 또 한 명은 러시아 피겨스케이팅협회 사무총장의 부인이다. 채점을 하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심판진 15명 가운데 7명이 친 러시아 사람들이니 공정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자 피겨에서 기대했던 금메달이 은메달로 바뀐 데다 다른 종목도 기대보다 부진해 한국의 종합 10위 진입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김연아의 말대로 결과에 만족하지 않으면 어쩌겠나. 10위 이내에 들지 못한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보다 더 아쉽고 분한 것은 '아디오스 노니노(아버지 안녕히)'라는 작별의 탱고 음악을 골라 필생의 멋진 연기를 보이며 마지막 승부의 무대에서 내려온 김연아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연아는 결과를 받아들였고, 실수 없이 마무리 지은 것을 홀가분해했다. 자신에게 120점을 매긴 것은 그날 하루 경기를 잘했다는 자찬이나 오만이 아니라 밴쿠버 올림픽 이후 4년 동안 심리적 체력적 한계를 극복한 데 대해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는 마음이었다. 안타까우면서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것은 밴쿠버 올림픽 이후 목표가 없어 동기 부여가 되지 않더라는 고백이었다.

메달을 땄건 따지 못했건 상을 받았건 받지 못했건 자신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에 한눈팔지 않고 매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1992년부터 국가대표로 뛴 이규혁은 36세인 지금까지 6번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끝내 메달은 따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경기를 펼치고 "올림픽은 핑계였을 뿐 스케이트가 계속 타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메달을 떠나 스케이트를 통해 삶을 배웠고, 그래서 행복했다"고도 했다.

어떤 분야든 저마다 자기 일을 충실히 하고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 좋은 사회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의 금메달에 착잡해하면서 훌륭한 선수를 내몬 것을 욕하거나 안현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왜 조국을 떠났는지 생각해보면 그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나라 선수가 우리나라에 귀화해 메달을 따주는 건 좋고 우리나라 선수가 다른 나라에 메달을 바치는 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금메달리스트 이상화는 동메달에도 기뻐하는 외국 선수를 보며 "우리나라 선수라면 그러지 못했을 거다. 그게 참 부럽고 슬펐다."고 말했다.

많은 환호와 눈물, 극적 드라마를 만들어 낸 소치 올림픽이 저물어가고 있다. 올림픽은 지는 법, 구경하는 법, 어울리는 법을 가르쳐주는 삶의 무대다. 이제 4년 후 2018 평창 올림픽을 소치보다 더 멋지게 치러내야 한다. 소치의 심판 판정이 문제라면 우리는 그런 일이 없게 하면 된다. 러시아를 거꾸로 읽어 '아, 시러'라고 하거나 소치는 '올림픽의 수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식이라면 평창은 평화를 창조해내는 무대가 되게 해야 한다.

피겨 경기가 끝나면 선수는 '키스 앤 크라잉 존'에 앉아 채점결과를 기다린다. 피겨선수가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긴장되고 설레는 공간에서 남들의 평가를 기다리는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사실 핑계였을 뿐 나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사람들은 많을수록 좋다. 이규혁 김연아 이상화, 이 훌륭하고 성실한 선수들의 말에서 한국인들과 한국사회가 점점 더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철순 논설고문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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