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죽는다. 그래서 죽음은 평등하다고 한다. 산 자들은 죽은 자의 영면을 빈다. 그러나 정치 권력의 정통성과 연계된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으며 잠들 수 없다. 산 자들이 권력 관계에 따라 필요할 때마다 죽은 자를 깨워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인들, 특히 최고 권력자가 되려는 정치인들은 대통령 출마에 앞서 국립묘지, 그 중에도 전직 대통령 묘소 참배를 빼놓지 않는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죽은 자를 매개로 전개되는 권력의 연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자와 그의 무덤은 추앙되거나 부인됨으로써 그 연극 무대에 서 있는 권력자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낸다."(이상 443쪽에서 인용)
정치학자인 하상복 목포대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가 쓴 은 프랑스 미국 한국에서 국립묘지의 탄생과 진화의 역사를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국립묘지라는 상징이 정치 권력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명쾌하게 보여준다. 구체적인 분석 대상은 프랑스의 팡테옹,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 한국의 국립현충원이다.
국립묘지는 근대 이후 나타난 제도다. 프랑스혁명 이듬해인 1790년 혁명 영웅들의 영묘로 출발한 팡테옹이 효시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건설하고 다지는 데 국립묘지가 필요했던 거다. 국가와 국민과 애국심의 표상으로서 국립묘지를 만든 것은 미국과 한국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누가 들어가느냐를 두고 오랜 세월 갈등을 겪은 것도 공통점이지만, 진화 과정과 결말은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팡테옹과 알링턴 국립묘지는 국민 통합의 공간으로 진화했지만, 한국의 국립현충원은 지금도 극심한 이념 대결과 반목의 무대가 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는 한국의 국립현충원을 '반공군사주의'와 '권력주의'가 장악한 곳으로 본다. 출발부터 그랬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반공' 용사들의 묘지로 1953~1957년 조성됐다. 이 곳의 권력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박정희 대통령 묘역이다. 가장 높은 곳에 가장 크게 조성돼 있다.
신성해야 할 국립묘지가 정치적 연출과 갈등의 공간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는 2005년 북한 대표단의 현충원 참배와 2009년 김대중 대통령의 안장 당시 벌어진 논란이다. 보수 세력은 격렬히 반대했다. 반공의 성역에 그들을 들일 수 없다는 논리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현충원 묘역은 극우 세력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방화로 잔디가 불에 타기도 했다.
팡테옹은 처음엔 프랑스혁명과 공화국의 대의에 맞는 위인만 모셨지만, 나중에는 프랑스의 영광을 높인 군주와 가톨릭 성인까지 받아들여 기억함으로써 화해와 공존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기까지 근 100년이 걸렸다. 팡테옹을 둘러싸고 계속된 혁명과 반혁명의 대결은 1885년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이 곳에 안장되면서 끝났다. 위고는 이념을 떠나 누구나 추앙하는 국민 영웅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 기간인 1864년 조성된 알링턴 국립묘지는 남군과 싸우다 전사한 북군의 묘지로 출발했다. 남군은 철저히 배제됐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40여 년이 지나서야 알링턴 묘지에 남군 묘역이 생겼다. 지금 알링턴 묘지는 미국 독립전쟁 전몰자부터 9ㆍ11 테러 희생자까지 미국이 겪은 모든 전쟁의 비극과 영광을 기억하는 곳이다.
국립현충원도 팡테옹이나 알링턴 국립묘지 같은 바람직한 진화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질문을 던지며 제안한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양쪽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애국적 인물을 안장할 새 국립묘지를 만들자, 그런 인물이 없다면 텅 빈 국립묘지로 놔두자, 그것이 바로 한국이 정치사회적 현실을 말해주는 상징이 될 것이므로.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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