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모(59)씨는 2007년 1월 친구 소개로 만난 A부동산개발회사 상무 임모(59)씨로부터 경기 김포시 길산리 땅(6,611㎡ㆍ약 2,000평)을 개발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하니 보증을 서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임씨는 "대규모 공장을 지어 1년 안에 보증 대가로 10억원을 주겠다"며 안씨를 꼬드겼다.
임씨는 주저하던 안씨에게 "보증을 서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며 "정 못 믿겠으면 H저축은행 이사에게 우리 회사의 신용을 확인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며칠 후 H저축은행 청량리지점에서 만난 김모(55)씨는 "임씨의 부동산 회사는 세 차례 실사를 마친 믿을만한 회사"라고 말했다. 김씨가 건넨 명함에는 '영업이사' 직함이 쓰여 있었고, 직원들은 김씨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이사님"이라고 불러 믿을 만했다. 안씨는 그날 경기 평택시 상가 건물(26억 상당)을 담보로 제공하고 보증을 섰다.
하지만 임씨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2009년 1월 H저축은행은 안씨에게 연체 이자 독촉장을 보냈다. 은행은 "임씨가 보증을 선 후 4시간 만에 19억원을 대출해 갔고, 부동산 개발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임씨가 공장을 짓겠다던 땅은 군 부대가 들어올 예정이어서 애초부터 개발이 불가능했다.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다"던 임씨는 그날 연락을 끊었다. 영업이사라던 김씨는 H저축은행 청량리지점과 업무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 대출상담사에 불과했다.
2009년 4월 저축은행은 안씨에게 "담보의 소유권을 넘기라"며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안씨는 "주범 임씨와 가짜 영업이사 김씨가 범행을 공모했고, 김씨의 명함에 '영업이사' 직함을 쓰게 한 저축은행도 사기를 방조한 책임이 있다"고 맞섰다. 그러나 재판부는 2011년 11월 저축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주범 임씨가 도망쳐 김씨와의 공모혐의를 입증할 수 없는데다 저축은행도 "이사 직함은 영업관례일 뿐 범행에 악용된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신씨는 "원금 19억원에 이자까지 모두 33억8,000만원을 물어내야 했다"며 "집도 가압류 당해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경찰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던 주범 임씨가 충북 청주의 한 찜질방에서 경찰에 검거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임씨는 경찰 조사 중 김씨와 공모 사실도 자백했다. 김씨는 임씨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성동경찰서는 2월 17일 노원구 상계동 지인의 집에서 은신 중이던 '가짜 영업이사' 김씨를 검거해 검찰에 송치했다고 19일 밝혔다.
임씨의 사기범죄 공소시효는 3월 28일로 불과 한달 남짓 남은 상태였다. 안씨는 "절벽 끝에서 구원받은 기분"이라며 "김씨 조사결과를 토대로 관련자인 H저축은행에게도 다시 사기 방조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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