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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울외투 벗는 영춘화, 담장너머 문득 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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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울외투 벗는 영춘화, 담장너머 문득 봄이…

입력
2014.02.1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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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메. 징글징글한 거. 이눔의 농삿닐."

천은사 가는 길.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밭에서 만난, 콕콕 호미로 해토머리 흙을 찍고 계신 할머니는 일흔은 돼 보였다. 올해 처음 나오신 밭일이란다. "보름밥 지어 묵었응께 인자 일해야지. 봄이 그저 온당가? 이래 몸을 놀려야 오는 것이제." 하지감자 씨알을 박아 넣을 고랑을 고르는 몸놀림이 평생을 다진 품으로 옹골졌다. 말로는 지겹다 하셨지만, 새 계절을 맞는 기꺼움이 그니의 고부린 몸에 꽉 차 있었다. 호미질에 뒤집힌 시꺼먼 흙에서 하얀 훈김이 피어 올랐다. 흙더미엔 파란 봄까치꽃이 앉아 있었다.

정월대보름이 들어 있던 지난 주 지리산의 아랫자락으로 갔다. 이를테면 자유연상의 결과일 수 있겠다. 달, 어머니,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더는 달의 시간(月曆)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이 나라에서 지리산 남녘은 늙은 어머니의 치마폭 같은 곳이어서, 거기 가면 달빛도 유백색의 옛 밀도를 잃어버리지 않고 하늘에 걸려 있을 것만 같았다. 딱히 정해둔 목적지는 없었다. 순천완주고속도로를 벗어나기 전 마지막 휴게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 든든했다. 말하자면 이런 여행이다. 1,500㏄짜리 낡은 자동차를 바랑 삼아 주섬주섬 필요한 것을 집어넣고 떠난 늦은 겨울, 아니 이른 봄날의 해찰 혹은 만행(卍行).

"공부에 끝이 있나요. 이 문 나서면 다시 시작인 게지."

하동 쌍계사에서 진짜 만행길에 나서는 이들을 만났다. 농가에서 한 해를 시작하며 액을 막는 동제를 지내는 날인 대보름은, 절집에선 겨울 한철 공부를 끝낸 납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운수행각을 떠나는 날이다. 음력 시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산문을 닫아걸고 앉아 화두를 부여잡는 것이 천칠백년 한국 불교의 전통이다. 천은사, 화엄사, 연곡사, 내원사, 대원사, 실상사… 이날 지리산은, 산을 빙 둘러 자리한 천년고찰들의 분주함으로 들떠 오른다. 석 달 불식촌음(不息寸陰)의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목련도 매화도 아직 망울에 갇혀 딴딴했지만, 묵은 절집의 풍경은 스님들의 말간 얼굴로 철이 바뀌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쌍계사에서 계곡길로 십오 리쯤 더 깊숙이 있는 칠불사. 이 절집의 유서 깊은 아자방(亞字房)에서 동안거를 지내고 나오는 스님에게 불쑥, 공부가 어떠했느냐고 물었다. 뱉어놓고 보니 밑도 끝도 없이 무례한 말이다. 빙충맞은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스님은 면박을 주는 대신 "끝이 없다"는 대답을 들려줬다. 잿빛 바랑을 짊어 멘 걸음걸이만큼 그의 목소리가 표표했다.

의신마을로 갔다.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마을엔 전에 못 봤던 울타리를 높게 두른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뭘까. 마을의 사무국장 정봉선씨가 내민 명함엔 의신마을이란 이름 대신 '베어빌리지' 다섯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늦어도 올 여름까지 그 울타리 안에 반달가슴곰 두 마리가 살게 된다고 했다.

"지금도 산에 29마리를 풀어놨는데, 얘들이 다 야생에 적응하는 건 아니에요. 민가 주변을 못 떠나고 맴돌면서 밭을 망치는 애들 둘을 우리가 키우기로 했어요. "

의신마을은 곧 지리산 반달곰을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생태교육장으로 변모한다. 그런데 이 마을은 본래 고로쇠물로 유명한 곳이다. 정씨에 따르면 의신마을은 1980년대 중반 전국 최초로 고로쇠물을 상품화했다. 그러니 고로쇠에 관한 내력도 꽤나 깊을 듯. 역시나 마을의 이야기는 멀리 신라시대까지 닿아 있었다. 의신마을은 신라 화랑들의 수련터였다고 했다. 옛날 어느 화랑이 쏜 화살이 고로쇠 나무에 박혔는데, 화살촉을 뽑아낸 자리에서 수액이 흘러나왔다. 목이 말랐던 화랑은 그 물을 마셨다. 화랑은 무술 연마 중 뼈를 다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물을 마신 뒤 거짓말처럼 상태가 좋아졌다. 이후로 대대로 마을에선 고로쇠물은 약으로 마셨다고 전한다. 전엔 도끼로 나무에 상처를 내고 대접에 받아 마셨다지만 요즘은 지름 6㎜의 구멍을 뚫고 링거관처럼 생긴 추출 장비를 쓴다.

"고로쇠 수액은 경칩 전후로 가장 많이 나왔어요. 나무가 새 잎을 틔우기 위해 물을 빨아들이는 시기죠. 밤엔 영하 5도, 낮엔 영상 7~8도 될 때인데, 온난화 때문인지 그 시기가 점점 빨라지네요."

악양면으로 갔다. 평사리 최참판댁. 소설 의 배경이 된 곳이다. 관광지로 유명해진 탓에 평일인데도 고택은 웅성웅성했다. "봐라봐라, 여 벌써 개나리가 항그 폈데이." 낙동강 물줄기 동쪽의 어느 농촌에서 온 듯한,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계모임 나들이인 듯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구석에 모여 호들갑스럽게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가봤다. 담장 끝에 터진 작고 노란 빛의 두름. 개나리가 아니라 영춘화(迎春花)였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산과 들의 샛노란 빛깔. 한참을 봄맞이꽃과 함께 볕바라기를 하다가 평사리의 들로 내려왔다. 그런데 거기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대나무 가지를 엮어 세운 달?말이다.

"에이아이인지 뭐신지 때매 군에서 몬하게 해서요… 맞심더. 우리 동네 달집이 진짜 멋있는데예…"

관광안내소의 직원 말이 그랬다. 하지만 대보름날 떠난 여행에 달집 태우기를 못보고 돌아온다면 안 될 일. 그래서 산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거기도 없었다. 주민에게 물었더니 달집 태우기를 자제하라는 공문은 군이 아니라 도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라도 쪽은 괜찮을 거라고 했다. 낭패. 덕천강 언저리에서 시간을 가늠해 봤다. 해가 산 쪽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이날 지리산 지역의 일몰 시간은 오후 6시 11분, 월출 시간은 오후 5시 41분. 밟으면 될 것도 같았다. 밟았다. 오후 6시 30분, 구례읍 서시천변에 마련된 달집에 겨우겨우 불을 당기기 직전 도착할 수 있었다. 누가 나와서 축문이라도 읽을 줄 알았는데 크게 틀어놨던 뽕짝을 잠시 끄고 카운트다운을 하는 걸로 점화 의식은 진행됐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와아아!"

대나무는 천연 번개탄이다. 달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사는 도시인에게 제 뿌리의 오랜 습속을 일깨우기엔 달집의 불은 너무나 짧았다. 불은 화라락 타올랐지만 곧 꺼졌다. 하지만 여운이 깊었다. 뱃구레 속이 오래 뜨끈했다. 그건 어머니산, 지리산 자락에서 한나절 받은 이른 봄볕의 기운임이 분명했다.

[여행수첩]

●지리산 남쪽 자락 여행은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IC,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IC에서 시작하는 게 편하다. 3~5월 하동에서는 고로쇠축제, 화개장터 벚꽃축제, 야생차 문화축제 등이 이어진다. 구례에서는 3월 중순 산수유꽃축제, 4월 중순 섬진강변 벚꽃축제가 열린다. 하동군 문화관광과 (055)990-2380 구례군 관광안내 (061)780-2450 ●의신마을 고로쇠는 전국 최고의 품질로 유명하다. 5월부터 반달곰 생태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서산대사명상길, 빨치산루트 등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055)883-3580 ●구례군 토지면은 운조루, 곡전재 등 조선시대 대표적 양반 가옥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오미마을에 있다. (061)781-5225

구례·하동·산청=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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