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은 선만으로 대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미술 장르다. 줄리언 오피처럼 보편적인 색을 골라내는 능력도, 앤디 워홀 작품에 담긴 도발적인 사상도 드로잉에서는 필요가 없다. 필요한 건 오직 연필(또는 펜)과 종이뿐. 그러나 이는 반대로 연필 외에 어떤 것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화가는 가늘고 빈약한 연필선 하나에 의지해 색채와 조형, 사상의 빈 자리를 메워야 한다.
드로잉의 이 같은 매력은 숱한 작가들로 하여금 드로잉을 습작이 아닌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 장르로 추앙하도록 만들었다. 요절한 천재 작가 최욱경은 한국적 색채 추상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후에 나온 수백 장의 드로잉 작품은, 그가 선 하나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얼마나 매료돼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선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작은 전시가 지금 서울 압구정동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프랑스 화가 이방 르 보젝의 드로잉 전 'Y's back'에서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월 드로잉을 포함해 A4 용지에 펜으로 그린 드로잉 작품 수십 점을 볼 수 있다.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 출신인 르 보젝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2001년 대전 한림미술관(현 대림미술관)에서 고낙범 작가와 함께 전시한 것을 시작으로 공주국제아트페스티벌, 경남미술관 그룹전 등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의 드로잉에는 지극히 프랑스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소위 '프랑스적인 그림'은 의외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데 프랑스를 대표하는 삽화가 장 자크 상페의 그림이 들어간 등의 책이 국내에서 크게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가벼운 그림 속 가볍지 않은 메시지'라는 프랑스식 이중성은 르 보젝의 그림에서도 발견된다. 성기나 여체 같은 자극적인 소재가 펜 선의 빈약함 뒤에 숨어 귀엽고 담백하게 표현돼 있다.
"하나의 펜으로 모든 그림을 그리는 작가예요. 잉크의 양에 따라 선의 굵기와 번짐이 달라지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되지 않으면 원하는 느낌을 표현할 수 없죠. 전시의 대표작인 '줄 타는 예술가'도 조금만 방심하면 줄 위에서 떨어지는 광대에 예술가의 운명을 빗대는 것입니다." 이혜림 큐레이터의 말이다. 전시는 다음달 8일까지 열린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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