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서울 중구 청계천로 110, 일명 '화교사옥'. 전날 밤 이곳을 할퀴고 간 화마는 주민 2명의 목숨을 앗아 갔고, 2층짜리 가건물을 폭삭 주저 앉혔다. 주민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폐허가 된 쪽방 속에서 불길이 닿지 않은 집기들과 옷가지들을 챙겼다.
60년이 넘은 목조 건물로 불이 날 우려가 끊이지 않아 1986년 화재 경계지구로 지정된 화교사옥은 무허가 가건물로 재개발ㆍ재건축이 쉽지 않아 사실상 안전관리의 사각지대로 방치돼 왔다. 결국 이번 화재는 예고된 비극이라는 지적이다.
서울 중부경찰서와 중부소방서 등에 따르면 17일 오후 10시쯤 쪽방촌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2층 일식 목조 슬레이트 건물에 살던 전모(80ㆍ여)씨와 추모(88ㆍ여)씨 등 2명이 사망하고 박모(50)씨 등 6명이 연기를 들이마셔 치료를 받았다. 또 1층 공구상가 31곳 중 18곳(100㎡)과 쪽방촌 42가구 중 12가구(440㎡)가 불타, 소방 당국은 피해액이 1억8,000여만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불이 나자 소방 당국은 청계2가에서 3가 방향의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소방차량 75대와 소방관 338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건물 일부가 붕괴돼 구조가 어려웠고, 18일 새벽 5시쯤 잔불이 다시 발생해 진화 작업은 오전까지 계속됐다.
화재 발생 당시 1층 공구상가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 중부소방서는 "2층 전씨의 집 안 연탄보일러 옆에서 불길이 올라왔다"는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정확한 화재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화재로 숨진 전씨는 보일러 옆에 쓰러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한 추씨의 딸 나모(61)씨는 같이 살던 초등학교 6학년 조카를 대피시킨 후 추씨를 구하려 했지만 거세진 불길과 연기 탓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머니를 잃어 이웃 주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경찰은 사망한 2명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실시하기로 했다.
1928년 서울에 사는 중국인들을 위해 지어졌다가 한국전쟁때 소실돼 1951년 재건축된 화교가옥은 주한 대만대표부가 토지의 법적 소유자이지만 건물은 누가 지었는 지도 알 수 없는 무허가 가건물이다. 때문에 책임소재가 불분명해 논란이 됐었다.
중구청은 오래전부터 대만대표부와 상가관리자인 한성화교협회에 화재에 대비한 안전 조치를 취할 것을 권유했지만 강제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화교사옥은 안전시설 없이 방치됐었다.
화교협회 관계자는 "몇 십년간 불법으로 건물을 만들어 생활하는 사람들을 내쫓을 수도 없고, 소유자도 대만 정부여서 섣불리 처리하기 어렵다"며 "중구 측과 대책을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중구는 협회에 피해 보상 대책 마련을 주문하고, 향후 안전 조치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토지 소유주인 대만대표부를 상대로 고발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중구는 쪽방 주민들을 위해 인근 찜질방을 임시숙소로 제공하고, 기초생활수급자인 사망자 유족에게 1인당 75만원의 장례비를 지급하는 등 피해자들을 지원할 계획이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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