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팔도강산' 시리즈 등에서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줬던 영화계의 대모 황정순씨가 17일 밤 9시45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1925년 경기 시흥에서 출생한 고인은 어릴 적 영화 '타잔'을 본 뒤 배우의 꿈을 키웠다. 15세이던 40년 홀어머니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에 입단하며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 41년 '그대와 나'(감독 허영)로 영화데뷔식을 치렀으나 연극무대에서 연기 잔뼈가 굵었다. 45년 극단 자유극장 창립단원, 47년 서울방송국 전속 성우, 한국전쟁 중 국방부 정훈국 활동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고인은 1957년 '사랑'(감독 이강천)으로 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충무로에 입지를 다졌다. 김수용 감독의 '혈맥'(1963)과 유현목 감독의 '김약국의 딸들'(1963)을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육체의 고백'(1964ㆍ감독 조긍하)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양공주 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나이든 부모가 전국 각지의 딸과 사위를 만나기 위한 유람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사연을 전하는 영화 '팔도강산'(1967ㆍ감독 배석인)에 고 김희갑씨와 출연해 큰 인기를 얻었다. '팔도강산' 시리즈는 5편까지 만들어지며 197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의 풍경을 담아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그의 영화 출연작은 377편이다.
고인은 70년대 초반 브라운관에도 진출했고, 80년대 초반 드라마 '보통사람들'에서 평범한 한 가족의 할머니 역할을 하며 안방에 훈훈한 가족애를 전하기도 했다. 72년 배우지망생을 위해 서울예전(서울예대)에 황정순 장학회를 설립했고, 88년엔 서울 혜화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100석 규모의 황정순 소극장을 개관하는 등 후진양성을 위한 노력도 많이 기울였다. 노환에도 99년 연극 '툇자 아저씨와 거목'과 2005년 뮤지컬 '팔도강산'에 출연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김수용 감독은 "그만한 배우가 지구상에 몇 없다"며 "어머니 역할 뿐만 아니라 노처녀나 멋쟁이 여배우 연기도 아무 문제 없이 해낸 배우"라고 평가했다.
'혈맥'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3회 수상했다. 고인은 지난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올라온 채 영화발전공로상을 받아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이성규(자영업)ㆍ딸 일미자(주부)씨가 있다. 빈소 서울성모병원장례식장 31호, (02)2258-5940, 발인 20일 오전6시.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