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묵은 이야기다. 소설 을 비롯해 글과 영상과 노래 등으로 마르고 닳도록 다뤄진 허다한 유사 소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영화 '노예 12년'은 마음을 울린다. 130분 동안 스크린을 채우는 인류의 잔혹사에 가슴이 요동치고 목젖이 뜨거워진다.
이야기는 1841년 미국 뉴욕에서 출발한다. 자유인인 '미스터'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으로 살다가 '깜둥이' 플랫으로 12년 동안 인생을 유린 당한 한 흑인 남자가 내내 스크린 중심에 선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아내와 자녀들과 풍족한 삶을 누리던 노섭은 어느 날 납치돼 남부 노예주로 팔려간다. 인간에서 '재산'이 되면서 노섭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바이올린 활을 들고 현을 짚던 손은 목화를 따고 사탕수수를 베는 기계로 전락한다. 노섭은 잠시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주인 윌리엄(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총애를 받기도 하나 12년 동안 그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오직 악몽과도 같은 끔찍한 현실이다. 가혹한 노동과 잔혹한 학대와 비정한 배신이 그의 몸과 마음을 할퀸다.
노섭과 그의 흑인 동료들을 쾌락과 재산형성의 도구로만 보는 백인 노예주의자들의 악행에 진저리처지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돈에 눈이 멀어 아이와 엄마를 억지로 떼놓는 한 노예상의 비정함(그는 "내 양심은 동전의 크기를 못 넘는다"고 주저 없이 내뱉는다), 노섭이 백인 감독관에게 저항했다가 목이 밧줄에 매달린 채 발이 진창에 닿을 듯 말듯한 상황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 모습, 악랄한 농장주 에드윈(마이클 패스벤더)이 자신이 노리개처럼 대하는 펫시(루피타 니용고)를 농락하고 가학적 쾌락을 얻는 장면 등에서 눈이 저절로 감긴다.
인간의 잔학성을 목도하는 와중에도 눈두덩이 뜨거워지거나 인간의 존엄을 되돌아보게 하는 순간이 있다. 노섭이 자신을 노예로 인정하지 않기 위해 거친 매질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모습, 노섭이 윌리엄으로부터 포상으로 받은 바이올린을 들고 설움인지 감동인지 모를 얼굴로 울음을 꾹 참는 장면, 펫시와 노섭이 나누는 눈물 어린 우정 앞에 관객의 가슴과 눈물샘은 무장해제된다.
영국의 유명 영상 아티스트 출신인 스티븐 맥퀸(그는 흑인이다)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헝거'(2008)와 '셰임'(2012)으로 영화에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각인해온 맥퀸은 한때 미국 사회에 드리웠던 지옥도를 세밀하게 스크린에 펼쳐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 눈 부릅뜨고 과거를 새삼 되새겨보라고 그는 강권하는 듯하다.
3월 3일(한국시간) 열릴 제86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녀조연상 등 9개 부문 후보에 올라있다. 아카데미상은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협회(AMPAS)가 주최한다. 백인 남자 위주로 운영돼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아온 이 단체도 이 영화의 진한 호소력을 외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흑인 감독의 영화들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주지 않았던 아카데미상의 어두운 전통이 '노예 12년'으로 깨진다면 대중들이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노예 12년'은 최근 제67회 영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11개 상을 휩쓸었다.
솔로몬 노섭이 겪었던 실화가 바탕이 됐다. 노섭의 고난에 찬 12년은 1853년 동명의 자서전으로 발행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작자로 참여한 브래드 피트의 연기를 짧게나마 만날 수 있다. 2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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