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연안의 작은 반도 국가, 서양과 동양의 교차점인 그리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2000년 올림픽 주최국, 천문학적 국가 부채, 고질적 파업 등이다. 그런데 얼마전 그리스에 갈 기회가 있었다. 아테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교통 표지판이나 상점 간판을 보면서 마치 수학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온통 알파, 베타, 델타 등 마치 수학공식을 보는 것 같았다. 이들 수학기호는 모두 그리스 문자들이기 때문이다. 수학기호로 표기된 간판을 보면서, 이 나라가 지금은 악성 국가 채무와 고질적인 파업으로 시달리지만, 과학이 태동한 곳이고 서양 문명의 원산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라와 민족마다 언어가 다르고 그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다르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의 언어와 글자에 녹아있다.
이번 동계 올림픽을 주최한 러시아는 어떤가? 러시아는 33개로 이루어진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로마식 알파벳과 비슷하지만 순서도 다르고, 글자 모양도 뒤집어져 있거나, 모양이 변형된 것처럼 보여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는 '믿거나 말거나'일화가 있다. 옛날에는 러시아도 나라 말씀이 서구와 달라 국민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황제가 서양 로마글자를 가져오라고 태스크포스팀을 유럽에 보냈다. 이들은 서유럽에 가서 로마 글자를 수집해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만 다뉴브강을 건너다가 배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글자가 강물에 빠졌다. 황급히 건져 올렸지만 순서가 헝클어졌고, 앞뒤가 바뀌어 오늘과 같은 러시아 알파벳 세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러시아는 이 같은 자국 글자를 가지고 개막식을 인상 깊게 시작했다. 각 알파벳 글자로 시작하는 러시아 유명 인물과 자랑거리를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준 것이다. 유명인들 가운데는 예술가와 과학자가 태반이다. 러시아 예술가하면 떠오르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문학가를 필두로 차이콥스키, 샤갈, 칸딘스키 등이 등장한다. 과학자로는 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 헬리콥터를 발명한 시코르스키 등이 눈에 띄지만, 과학기술은 문화예술과 달리 개인보다는 집단적 노력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다. 이에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우주정거장 미르 등 러시아 과학기술의 결정체가 나온다. 개막식 동영상을 통 털어 9명의 예술가와 8명의 과학자가 러시아의 대표선수로 출정했다. 여기에 러시아에서 제작해서 세계적으로 히트한 '안갯속의 고슴도치'라는 애니메이션을 집어넣는 센스도 발휘했다.
이 칼럼을 통해 필자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외쳐왔다. 그런데 이 개막식 영상을 보고 융합도 중요하지만, 과학자는 과학을, 예술가는 예술을,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초가 튼튼해야 그걸로 융합한 결과도 훌륭할 것이 아닌가. 수준 낮은 과학과 평범한 예술이 만연한 사회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는 있으나 뛰어난 문화를 만들기 어렵다. 혹시 우리나라가 이런 상황이 아닐까?
개막식 영상을 보는 동안 우리나라 같았으면 과연 누구를, 무엇을 내세웠을까 생각했다. 이순신 장군, 싸이, 김현아, 박지성 이거나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한강의 기적, IT산업,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한류문화도 빼놓울수 없다. 순수예술과 기초과학 분야는 어떤가. 아쉽게도 예술가 중에는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윤이상, 백남준 정도다. 과학자는 불행하게도 전무하다. 현재 우리나라 국력이라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전세계인이 알만한 인물이 한두 명쯤은 나왔을 법한데 말이다.
왜 그럴까? 이유야 많겠지만 무엇보다 과학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내고, 과학을 노벨상 수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다 보니 과학의 본질인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거기서 느끼는 희열 그 자체보다 물질적 보상과 사회적 명예가 과학연구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과학과 예술은 외부적 동기부여보단 그 자체가 원동력이 돼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기본으로 돌아가자. 4년 후 평창 동계올림픽에선 몰라도, 100년 후 올림픽에선 한글 24개 자모음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세계적인 과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하자. 그러려면 지금 시작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원광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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