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그 복잡하고 두꺼운 악보를 어떻게 외우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장래의 꿈이 피아니스트인 아들의 시원찮은 기억력을 걱정하는 어느 학부모의 푸념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악보를 외우는 것을 '암보'라 일컫습니다. 암보에는 여러 기억력이 입체적으로 동원되어야 하는데, 알량한 머리보단 근육의 우직한 기억력이 어느 땐 훨씬 믿음직스럽기도 합니다. 근육이 기억하려면 무한 반복하며 시간과 함께 천천히 숙성되어야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곡을 완성해야 할 경우 인위적인 안전장치들이 필요합니다. 암보의 요령을 간단한 수열의 암기에 빗대어 설명해 볼까요.
숫자 20개를 임의로 줄을 세워 수열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35710152126510172489' 나란히 서 있는 이 배열을 통째로 암기하려면 어떤 요령이 필요할까요. 영화'레인맨'의 주인공은 전화번호부 한 권을 거뜬히 외우더만, 계좌번호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저로선 매우 난감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머리는 매끈히 넘어가도 중간부턴 뒤엉켜 버리기 일쑤, 무작정 암기가 흔히 겪는 장애입니다. 이 숫자들을 악절 다루듯 해체 혹은 조합해 보겠습니다.
357은 애써 외울 필요가 없는 전형적인 홀수의 나열입니다. 악보에서도 이렇듯 통상적인 흐름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부풀어 오른 딸림화음이나 감화음으로 촉발된 갈등은 으뜸화음의 안정된 품에 이끌리기 마련이지요. 1015는 제 음력 생일인데 작곡가들의 유니크한 아이디어를 표현한 악절이라 빗대자면, 그다음 2126은 앞의 수열을 한음 올려 조옮김한 악절과 같고, 생일 프레이즈를 거꾸로 비틀어 반복한 후(5101), 7이란 연결고리를 통해 짝수 주제 248을 등장시키며 첫 주제와는 대조적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맨 뒤에 붙은 9는 새로운 이야기의 전개를 배태한 숫자입니다. 코다나 전개부로 이어질 테지요.
자, 이제 35710152126510172489 이 숫자의 배열을 좀 더 수월하게 암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악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수열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복잡합니다. 악절이 몇 개씩 중첩되어 얼키설키 교차하거나, 문맥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진행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낱낱의 화성을 파악하며 악절의 기능과 동선의 의미를 구하다 보면, 암호의 비밀을 푸는 실마리를 찾은 듯 암보가 즐거워집니다. 안전장치를 이왕 더 튼튼히 부착하고 싶을 땐 음악의 흐름을 악보의 끝장부터 거슬러 오르며 머릿속 암보를 찬찬히 점검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무대 위에선 예측하지 못했던 뇌의 암전(Blackout)이 늘 도사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해서 어떤 변수에도 흐트러지지 않을 견고한 암보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개인적으로는 무대 위에서 와르르 와해된 부실공사의 역사가 이미 책 한 권 분량인데요. 일상적 연습이라도 복장이 터지긴 마찬가지입니다. 무한 반복으로 뺑뺑 돌아 이제야 악보를 외웠구나 안심하던 때, 냉장고라도 잠깐 다녀올라치면 음표들은 다 휘발하기 일쑤입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지요. '그 많던 음표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래도 '좌절 금지'의 미덕을 상기하자면, 화음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며 왼손만 따로 연습하는 것도 효과적인 연습방법입니다. 오른손의 주선율이 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밝고 선명한 사건이라면, 왼손의 반주음형은 어두운 물속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움직임과 같습니다. 알량한 암기력은 종종 수면 위 주선율에만 매혹되지요. 침몰하지 않기 위해선 어두운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왼손의 움직임을 더더욱 튼튼히 인지해야 합니다. 오른손의 인도 없이 왼손을 따로 기억하는 연습은 때로, 등대 없는 밤바다를 항해하듯 적막한 느낌을 주곤 합니다. 하지만 왼손만으로도 의연히 항해할 수 있을 때, 오른손의 등불은 보다 선명히 빛나고 항해력 역시 굳건해집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터득한 암보의 비결이더라도 누구에게나 통용될 리 없습니다. 이상, 복잡하고 두꺼운 악보를 어떻게 외우느냐는 질문을 받았던 한 음악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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