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 재판부는 강기훈(50)씨의 유서대필 혐의(자살방조)에 대해 23년 만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1991년 유죄의 증거였던 필적 감정의 허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법원은 강씨 필적과 고 김기설씨 필적의 유사성을 지적한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을 믿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과수 감정인은 유서의 필적과 피고인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감정했으나, 그 판단 근거로 제시된 유서 글자의 특징들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항상성이 있는 특징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보'자를'오'자로 잘못 판독했으며, 유서의 'ㅆ'과 'ㅎ'자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감정인 4명이 공동 심의한 것처럼 위증해 감정 결과에 신빙성이 없는 점도 지적했다.
당시 김씨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상이하다고 감정한 부분도 배척됐다. 재판부는 "국과수는 김씨가 정자체만 사용하는 것으로 속단하고, 필적 감정의 일반원칙에 위배해 속필체인 유서와 정자체인 김씨의 필적을 단순 비교해 감정 결과에 신빙성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2007년 이후 추가로 진행된 감정 결과들을 토대로 "유서는 피고인이 아니라 김씨가 작성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국과수는 2007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재감정을 실시했고, 1991년과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김씨의 전대협 노트ㆍ낙서장이 유서와 필적이 같다는 내용이다. 전대협 노트ㆍ낙서장은 김씨의 친구가 1997년 뒤늦게 발견한 것으로 1991년에는 감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검찰은 재심에서 전대협 노트 등이 김씨의 글씨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고, 김씨의 필적이 분명한 이력서, 전대협 노트ㆍ낙서장, 유서의 필적에 대한 재감정이 이뤄졌다. 국과수는 지난해 12월 "전대협 노트ㆍ낙서장은 유서와 필적이 동일하고, 이력서 등 김씨의 다른 자료도 필적이 동일하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는 감정 결과를 법원에 제출했다.
23년 전 강씨를 옭아맸던 국과수가 이번에는 강씨가 누명을 벗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나 91년의 감정 자체가 조작됐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별도로 하지 않았다.
재심 재판부는 강씨의 무죄를 뒷받침하는 관련자 진술 등도 공개했다. 당시 김씨가 "유서에 뭐라고 쓰면 좋겠냐"라고 물었다는 이모씨의 진술(재심 증언), 김씨가 "유서를 쓰는 등 신변 정리를 위해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홍모씨의 진술(원심 증언) 등을 근거로 검찰의 유죄 주장이 입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검찰이 고교 1년 중퇴인 김씨가 문장 표현력이 부족해 강씨에게 유서 대필을 요청했다고 주장한 부분도 재판부는 "김씨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문장력으로 볼 때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편 재판부는 사건의 파장을 의식한 듯 "장시간 재심 과정에서 협조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는 언급 외에 특별한 소회는 밝히지 않았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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