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의 남북 고위급 접촉이 사전에 조율된 의제 없이 열리게 돼 예측 불허의 남북 회담 성격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통상 고위급 외교 회담에선 실무진의 사전 접촉을 통해 철저히 조율된 의제를 다루지만 남북 회담에선 백지상태에서 담판을 시도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남북 회담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풍경이지만, 기싸움만 벌이다 빈 손으로 돌아오거나 북 측의 의도에 말려들 위험도 없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12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남북 고위급 접촉은 어떤 의제가 테이블에 오를지 모르는, 말 그대로 '깜깜이 회담'이다. 우리측 김규현 국가안보실 1차장과 북측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수석 대표로 참석, 남북관계 전반을 다룬다는 것 밖에 없다. 통일부 관계자는 "의제는 정해진 게 없다"며 "사전 조율을 위해 물리적으로 접촉할 시간도 없었다"고 말했다. 우리 측은 이산가족 상봉 등을 주요 의제로 다룬다는 방침이지만, 북이 어떤 카드를 꺼낼 지는 미지수다.
이는 북한이 의제를 특정하지 않고 고위급 회담을 제안해온 데 따른 것으로, 실무선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한 뒤 회담이 열리면 대표가 큰 틀에서 합의를 보는 통상의 외교적 관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특히 2007년 10월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이 그랬다. 당시 참여정부는 사전에 의제 조율을 시도했으나, 북측의 거부로 결국 구체적인 의제를 정하지 못한 채 남북 정상이 만났다. 회담 두 달 전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방북, 대화 파트너인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의제 설정 논의에 나섰지만 김 통전부장이 반대한 데 따른 것이다. "국방위원장의 의중이 있는 데 아래에서 의제를 정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 당시 회담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당시 정상회담도 시작 시간만 정하고 얼마나 할지 정해지지 않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강권하다시피 해서 오전에 이어 오후 회담까지 열었다"고 말했다. 결국 참여정부는 우리 측 요구사항을 점검하는 동시에 북측 요구내용을 짐작해 대응논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회담 준비를 했다. 이번 고위급 접촉도 이런 방식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예측 불허의 회담 방식은 남북 관계가 특정 의제에 국한되지 않는 복잡한 사정을 내포하기 때문에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남북 회담은 일반적 외교 관계와는 성격이 다르다"며 "이번 접촉의 경우 오랫동안 남북 대화가 단절돼 왔던 만큼, 포괄적인 논의를 통해 최고지도자간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 관계의 기 싸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깜깜이 전략'을 펴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다. 지난해 6월 '격 문제'로 무산됐던 남북당국회담도 당초 개최 시간과 장소만 정해진 상태에서 열기로 했던 '깜깜이 회담'이었다. 결국 회담 직전까지 수석 대표의 격 문제를 놓고 남북이 기싸움을 벌이다 회담 자체가 없던 일이 됐다. 일각에서 이번 고위급 접촉도 북한이 평화 공세를 취하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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