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닮(7)이는 세계적으로도 환자가 40명 정도에 불과한 희귀질환 '6번 염색체 결실'을 안고 태어났다. 지적 능력은 18개월 아이 수준이고 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혼자 걷지도 못한다. 걷기 위해 재활치료가 필요하지만 사회복지사인 아버지(43)의 수입으로는 생활비 대기도 빠듯하다. 그런 예닮이가 보조기구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최근 걸음을 뗐다. 쪼들리는 살림에 구입할 수 없었던 보조기 값 300만원과 치료비는 사람들의 '걸음 기부'로 마련했다.
걸음 기부는 스마트폰 앱 '빅워크'를 통해 이뤄진다. 이 앱을 작동시키고 걸으면 스마트폰의 동작 센서가 작동하면서 위성항법시스템(GPS)으로 거리를 측정, 100m 당 10원이 적립된다. 적립금은 후원기업들이 부담하는데 걷지 못하는 아이들의 치료비, 휠체어나 재활기기 구입비에 쓰인다. 큰 돈이나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자신이 걷는 만큼 걸음을 간절히 원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손쉬운 기부인 셈이다.
11일 빅워크에 따르면 2011년 6월부터 지금까지 어린이 25명에게 지원한 돈은 3억2,000여만원에 달한다. 이 앱을 다운받은 25만여명이 지구 80바퀴에 해당하는 거리(320만㎞)를 걸어 모은 돈이다. 걸음 기부에 동참하는 사람은 하루 평균 3,000여명에 이른다.
이 앱은 한완희(32)씨가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 두고 소셜벤처기업 빅워크를 만들면서 세상에 나왔다. 그는 직장생활 중에도 짬짬이 소규모 비영리단체(NGO)들의 포스터, 홈페이지 등 디자인 업무를 도우며 재능기부를 해왔다. 한 대표는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기부 방법을 고민하다가 걸음 기부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내친 김에 회사까지 차렸다"고 말했다.
기부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된다. 앱에는 자신의 적립금이 지원될 아이의 사연과 목표금액은 물론이고 실시간으로 기부 참가인원, 적립액수가 표시된다. 기부 대상 아동과 후원 액수는 아동복지 전문기관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선정한다. 지금까지 존슨 앤 존슨, 유니페어, 이화여대 등이 후원에 참여했다. 빅워크는 이들 기업, 학교들의 광고를 앱에 실어주거나 오프라인 걷기 행사를 통해 수익을 얻는다.
기부 참여자들의 반응은 매우 좋다. 취업준비생 최현영(25)씨는 "게임을 할 때도 안 그랬는데 빅워크 때문에 스마트폰 배터리를 두 개씩 챙겨 집에서 나온다"며 "앱을 켜놓고 걷기만 해도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경수 한양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액 기부가 일상화된 나라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는 대기업과 연말 이벤트 위주"라며 "빅워크처럼 일상적인 기부가 활성화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빅워크의 다음 목표는 부신백질 이영양증으로 몸이 굳어가는 지성(14)이와 레녹스 가스토증후군으로 몸 근육이 발달하지 못하는 동인(6)이를 지원하는 것이다. 지난달 14일 시작된 이 기부는 11일 현재 1만8,700여명이 3,500여만원을 모아 목표액(3,750만원) 달성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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