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한국시간) 모태범(25ㆍ대한항공)의 메달 여부에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던 러시아 소치의 아들레르 아레나. 모태범의 노메달보다, 네덜란드의 금ㆍ은ㆍ동 싹쓸이보다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선수는 따로 있었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1차 레이스 16조에 속한 대니얼 그리그(23ㆍ호주)는 스타트를 알리는 총성과 함께 두 팔을 힘차게 휘저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극도의 긴장감 속에 의욕이 앞섰던 탓일까. 상체가 쏠려 무게중심이 무너졌고, 왼발의 스케이트가 얼음판에 찍히면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10걸음도 못 가 얼음판에 엎어진 그리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파트너인 오이카와 유야(일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리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무거운 스케이트를 밀면서 홀로 레이스를 마쳤다. 100분의1초를 다투는 500m 종목이었기에 넘어진 순간 메달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이날을 위해 보낸 인고의 4년을 떠올리면 차마 기권은 할 수 없었다.
눈물의 완주를 한 그리그의 기록은 80초55. 보통 34~35초대를 끊는 출전 선수들의 성적을 감안하면 참담한 수준이었다. 처음으로 참가한 올림픽에서 믿기 싫은 실수 하나가 가져온 악몽이었지만 빙상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2차 레이스에선 안정된 레이스로 35초29를 기록했다. 2차 레이스만 보면 16위로 나쁘지 않았다. 최근 4년간 매서운 성장세를 보인 그리그는 호주의 기대주로 꼽힌 선수였기에 더 아쉬웠다. 지난달 일본 나가노에서 펼쳐진 국제빙상연맹(ISU) 스프린트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딴 그는 올림픽 대비 훈련에서 이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건 미헐 뮐더르(네덜란드)를 앞지르기도 했다. 경기 전날 훈련에서는 초반 100m 성적을 자신의 최고 성적으로 끌어올려 다크호스로 꼽혔다.
자책감과 허무함에 표정은 어두웠지만 그리그는 순위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올림픽 정신에 걸맞은 역주로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경기를 마친 뒤 그리그는 “스케이트 선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뼈아픈 일”이라고 아쉬워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이겨내고 내 투지를 다진다면 1,000m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쓰라린 마음을 다잡았다. 성환희기자
한국스포츠 성환희기자 hhsung@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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