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보스턴과 워싱턴 공항에서 4대의 여객기를 공중 납치한 범인 19명 중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은 15명이었다. 후폭풍은 엄청났다. 연방수사국(FBI)이 사우디 정부와 테러범의 재정 커넥션을 수사했고, 중앙정보국(CIA)은 사우디가 알 카에다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해왔다는 점을 확인했다. 유족들이 사우디 왕가 등을 상대로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자 사우디는 미국 내 투자자금을 회수하는 '자산 엑소더스'로 대응했다. 사우디의 강력 부인으로 9ㆍ11 배후설은 유야무야됐다.
■ 11년 뒤 사우디의 유력 왕족 3명이 일주일 새 연달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둘은 심장마비와 차량전복 사고였고, 세번째는 사막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석연치 않은 정황에도 불구, 사건은 이례적으로 신속히 종결됐다. 앞서 2003년에는 사우디 왕자 3명이 암살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는 CIA가 알 카에다의 수장 빈 라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알 카에다 서열 3위인 주바이다를 검거한 직후였다.
■ 미국과 사우디는 1945년 석유와 안보를 교환한다는 명분으로 동맹관계를 맺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둘의 관계는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계기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국이 사우디 안보와 이라크 응징을 위해 사우디에 미군을 파병하자 와하비(교리 중심의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 등은 '이교도 추방'을 외치며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사우디 왕족과 와하비파, 넓게는 사우디 정부와 국민 간 갈등이 돌이킬 수 없게 된 출발점도 바로 미군 주둔이었다.
■ 미국과 사우디가 이란 핵 문제로 다시 충돌했다. 미국이 이란에 핵 돌파구를 터주자 '시아파 맹주'인 이란의 패권 부상을 우려한 '수니파 맏형' 사우디가 강력히 제동을 건 것이다. 이란을 폭격할 수 있다면 중동의 적국인 이스라엘과도 손 잡을 수 있다는 강력한 자세다. 당황한 오바마 대통령이 내달 유럽 방문 직후 예정에 없이 사우디를 방문하는 등 '사우디 달래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이란 핵 타결이 미국의 사우디 불신에서 비롯됐다면 억측일까.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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