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관상 그들은 악몽이었다. 1900년대 스타일로 멋을 낸 비트족 수트에 커다란 푸딩 그릇 같은 머리라니. 음악적으론 재앙에 가까웠다. 기타와 드럼은 하모니와 멜로디를 무시하고 무자비한 비트를 쳐댔다.'
50년 전 비틀스의 미국 공식 데뷔 무대였던 1964년 2월 9일 CBS TV '에드 설리번 쇼' 방송 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이처럼 신랄한 기사를 썼다. 7,300만 시청자를 TV 앞에 불러 모은 네 명의 딱정벌레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 건 뉴스위크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기성세대들은 더벅머리에 날렵한 정장을 차려 입고 괴성을 질러대는 영국 로큰롤 밴드가 마뜩잖았다. 10대 소녀들의 열병도 오래 가지 않아 식어버릴 것이라 확신했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요즘과 달리 50년 전만 해도 영국과 미국의 팝 시장은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미국은 '신인 밴드' 비틀스의 영국 내 성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비틀스 멤버들도 미국 내 성공을 자신하지 못했다. 폴 매카트니는 자문했다. "미국에도 이미 록 밴드가 많은데 우리가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비틀스의 곡들이 영국 차트를 점령한 지 1년 가까이 됐을 때도 미국의 EMI 계열 음반사인 캐피털 레코즈는 이들의 음반 발매 요청을 줄기차게 무시했다. 아마추어 같고 대중적인 호소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였다.
로큰롤 혁명에 대한 기성세대의 저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라디오 방송국은 영국에서 가져온 비틀스 싱글 레코드를 지겹도록 틀어댔고 뒤늦게 발동이 걸린 캐피털은 24시간 공장을 가동하며 물밀듯 밀려드는 주문을 겨우 감당했으며 비틀스의 첫 미국 기자회견에서 "대체 몇 명이 대머리이기에 모두 가발을 썼냐"고 질문했던 기자들도 이들이 반짝 스타가 아님을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했다. 비틀스의 미국 상륙은 단지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이 아니라 팝컬처의 빅뱅이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9일은 비틀스가 미국에 데뷔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8년 비틀스 결성 50주년을 시작으로 2012년 10월 데뷔곡 '러브 미 두' 발매 50주년, 2013년 3월 데뷔 앨범 '플리스 플리스 미' 발매 50주년 등에 이어지는 '데뷔 50주년' 시리즈의 사실상 최종회다.
영국 데뷔 50주년 때는 조용하던 미국이 올해는 떠들썩하다. CNN 방송은 지난달 특집 다큐멘터리를 통해 비틀스가 1960년대 미국 문화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고 그래미상 측은 1월 26일 열린 시상식에서 비틀스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했다.
팝 스타들이 총출동한 비틀스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엔 비틀스의 생존 멤버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를 비롯해 그들의 가족, 세상을 떠난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이 참가해 관심을 모았다. 이 공연은 비틀스의 미국 데뷔 무대를 방영했던 CBS가 녹화해 9일 미국 전역에 내보낸다. 최근엔 캐피털이 영국판 오리지널 앨범을 편집해서 미국에 발매했던 앨범 13장을 모은 CD 박스세트 'US 앨범스'도 출시됐다.
50주년 기념 행사에 올을 올리는 한 편에는 '무슨 호들갑이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비틀스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 인색하던 그래미가 이제서야 공로상을 준 것에 대해 볼멘소리를 내뱉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틀스는 활동 당시 5회 수상에 그쳤다. 마니아들조차도 이미 수 차례 재발매됐던 비틀스의 앨범들을 포장과 손질만 달리해 비싼 값에 다시 내놓는 음반사에 불만이 적지 않다. 실제로 2009년엔 비틀스의 음반을 모노와 스테레오로 리마스터링해 내놓은 CD 박스세트가 발매됐고 2012년엔 아날로그 LP레코드 박스세트가 출시됐다. 'US 앨범스'까지 최근 5년 사이에 4종의 비틀스 박스세트가 발매된 것이다. 광고전문지 애드에이지는 최근 기사에서 "미디어와 기업들이 비틀스 50주년을 마케팅에 활용해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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