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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2월 7일] 발리엔 야자나무보다 높은 건물이 없다

입력
2014.02.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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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어간다. 난방비 걱정 없는 곳에서 겨울을 나겠다며 이 섬으로 건너왔다. 월세 30만원에 방을 구해 아침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동네를 산책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발리에 와서 내가 가장 놀란 건 종교가 이들의 일상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리의 종교는 인도의 힌두교와 중국의 불교가 섞여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샤 신 옆에 부처님이 누워 계시는 식이다. 발리에는 집집마다 가족 사원이 있는데 장남의 가장 큰 의무는 사원을 돌보는 일이다. 1년에 200일의 종교의식이 있다더니 정말로 매일 매일이 무슨 의례고 의식이다. 이곳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집 곳곳에 공양물 차낭을 바치는 일이다. 여자들은 그 차낭을 만들며 하루를 보낸다.

종교가 삶의 곡진한 이유가 되는 곳은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경이로운 마음이 들게 한다. 자신이 기대는 것이 허위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허위의 진실일지라도 고단한 삶을 견디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는 지혜로움. 그 사이에서 나는 날마다 신기해하며 발리 사람들을 바라본다. 어찌나 지극정성으로 신을 모시는지 내가 신이라면 발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만 같다.

발리 남자는 신에게 바쳐진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신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그러니 힘든 일은 모두 여성의 몫이다. 더구나 발리에서는 첫 번째 아내가 허락하면 남편이 아내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다. 내가 머무는 집만 해도 아내가 두 명. 그런데도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살아간단다. 남편을 공유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 "남자는 어른이 되어도 손이 많이 가는 애인데 나 혼자 뒤치다꺼리 안 해도 되고 나눠하니 좋아."

물론 이런 사고는 소유에 있어 공산주의적 사고를 가진 외국인 여성이나 순종적인 발리 여성이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아들 뻘 되는 발리 청년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이 가진 돈을 다 털어 남편에게 가게를 열어주고, 시어머니에게 새 오토바이를 사주고, 가족들에게 집도 지어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젊고 어여쁜 발리 여성을 아내로 들이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니까.

철저한 대가족제도가 살아있는 발리에서는 집 안에 여러 세대와 형제가 모여 산다. 이곳에서는 부자 친척에게 손을 벌리거나 얹혀사는 일이 아무렇지 않다. 그래서인지 발리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거나 사기를 치는 일에도 당당하고 자연스럽다. 그들에게 외국인은 돈 많은 부자 이웃이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이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로 바가지를 씌우니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그림과 춤, 노래와 목공에 능한 이 재주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오래된 삶의 방식을 지켜가고 있다. 이곳에는 원형은 다 무너지고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가짜 전통 따위는 없다. 축제는 여전히 그들 자신을 위한 축제이고, 사원도 그들의 신을 위한 장소다. 발리의 모든 건물은 야자나무보다 높이 지을 수 없게끔 법률로 정해져 있다. '5층 이하'라거나 '지상 20미터' 따위가 아닌 '야자나무보다 낮게'라니. 거기 깃든 시적인 마음과 융통성이 나는 너무 좋다. 그래서 발리에는 3층 이상 건물이 거의 없어 어디서나 논과 야자나무가 보이고, 숲과 계곡이 몸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발리는 자연을 파괴하며 함부로 리조트나 지어대며 돈에 영혼을 판 그런 흔한 휴양지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책 가 히트하기 반세기 전부터 서양인들은 발리의 문화에 반해 이곳을 찾아왔다. 외국인이 무엇 때문에 발리를 사랑하는지 발리 사람들은 잘 안다. 그래서 대대로 지켜온 그 문화를 외국인에게 비싸게 팔아먹는다. 발리에서 집을 구하는 서양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전망은 '논 전망'이다. 계단식 논 한가운데 자리한 발리식 전통 가옥이야말로 서양인들의 '위시리스트'다. 카페의 테이블 장식이 코코넛 열매 안에 심어놓은 모 한 줌인 식이다. 농지정리라며 계단식 논을 싹 밀어버리고, 주택현대화라며 초가집을 죄다 없애고, 무조건 개발을 외치던 시절을 거쳐 온 우리.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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