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은 혼자 산에 오르려고 한다. 산이 좋은 이유를 대라면 아마도 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분명히 예전과 다른 것은 요즘 들어 혼자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도 이유라 할 수 있다. 고요히 산을 올랐다가 고요히 내려오는 사람, 어르신들이며 여학생이며 외국인이며 그들은 특별한 혼자여서 돋보인다. 혼자인 모습이 보기 좋은 것처럼 나 또한 혼자 산에 오르는 것이 좋은 것은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오를 경우,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하거나 음식을 많이 먹거나 산행이 끝난 후에는 어김없이 어울려 술을 마셔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오르는 산과 남들과 같이 오르는 산은 그런 면에서 엄연히 다르다.
일요일이면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엘 갔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아들과 아버지가 산에 오르는 모습 또한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없다. 아이는 산에 올랐던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며 세상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산길에서 얻게 될 것이므로 그런 풍경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자못 든든해지는 산길이다.
인생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산의 길은 성실한 길이다. 어떤 산길이라도 가볍거나, 호락호락한 산길은 없으며 밋밋해 빠진 산길도 없다. 그럼에도 산에서 내려와 무색무취의 상태가 되거나 그저 그 상태로 세상의 먼지에 휩쓸려버린다면 산에 다녀온 사람의 자격이 아닐 것이다.
어떤 날, 산에 올랐다. 시간이 느지막해서 저녁노을을 보고 내려오자는 마음으로 경치가 확 트인 코스로 접어들었다. 그날의 노을은 내가 자주 보아왔던 대로 익숙한, 하지만 굉장히 명료한 노을이었다. 노을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두 모녀가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냥 지나치려고 보니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까지도 그랬겠거니와 꽤 높은 그곳까지 오르기엔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어서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딸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자신의 더딘 걸음 때문에 노을을 보지 못할까 꽤 조바심을 내고 있는 듯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볼 수 있어, 엄마." 라고 말하는 딸과 "아냐. 나 때문에 늦어서 못 볼 거야." 라고 체념을 섞어 말하는 어머니. 하지만 명백한 것은 늦어도 많이 늦었다는 사실. 그렇게 그런 속도로 오르기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여전히 의미 없는 일일 것이 당연했다. 왜 저 상황에서 이 산을 오르려 한 것일까. 두 사람을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희망이기는 한 것일까. 그럼에도 그 모녀를 지나칠 수 없는 것은 딸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미 해지는 풍경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행동이 불편한 엄마를 배려해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두 사람을 도와줄 방법을 찾았지만 별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밖에는. "그럼요. 조금만 더 올라가면 굉장한 노을을 볼 수 있고 말구요." 앞을 못 보는 엄마에게 노을의 아름다움을, 그 굉장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 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의식(儀式)이 됐건, 무한대의 소원에 관련하는 무엇이 됐건 두 사람 사이를 좀 더 촘촘히 해줄 거란 생각을 했다.
딸은 어머니에게 억지로 꾸며낸 노을의 아름다움을 말할 것이 뻔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대부분 뒤를 돌아보는 일의 비중이 크다는 건 알고 있지만, 순간 나를 마비시킨 이 엄청난 한 토막의 장면은 몇 달을 베어 먹어도 넉넉한 식량이 될 것만 같았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힘이 동나고 있었다. 노을을 보러 산에 오르는 두 사람을 본 것뿐인데 나는 자꾸만 뒤에 두고 온 풍경을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힘이 다 빠지고 있었다.
산은 어렵다. 정상의 시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쉬운 인생으로 살려는 태도의 사람에게 산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쉽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쉽지 않은 것이 우리를 달라지게 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추측은 작게나마 진실이다.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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