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지구에 만들어 놓은 비밀의 놀이터가 충북 영동에 있다. 여기 가면 산봉우리 오르락내리락하며 밤새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달을 볼 수 있다. 이 모습 어찌나 예쁘고 깜찍한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절로 미소 짓게 된다.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月留峯) 이야기다. 사위 고요한 한밤중, 함께 놀아 줄 벗은 없지만, 달은 신이 나서 홀로 환하다. 이번 주는 달 밝은 영동 땅으로 떠나는 여정이다.
●‘달의 놀이터’ 월류봉
월류봉은 황간면 원촌리 들머리에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초강천 옆에 느닷없이 솟았다. 높이가 고작 400m에 불과한데 그 기세는 고산준봉에 못지않게 등등하니 맞닥뜨리면 눈이 깜짝 놀란다. 이 봉우리 옆에 또 봉우리, 그 옆에 다시 봉우리…. 이렇게 키가 비슷한 여섯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어깨를 견주며 섰다. 월류봉 앞으로 길쭉하게 튀어 나온 바위 끝자락에는 작은 정자(월류정) 하나 자리 잡았다. 산과 강과 정자가 제 있어야 할 곳에 딱 있다. 이러니 풍경은 구도 잘 잡힌 명품 수묵화가 된다. 정자는 근래에 지은 것인데, 길이 없어 사람이 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리가 어찌나 기가 막힌 지, 이거 없었다면 감흥은 반감 됐을 거다.
눈 소박하게 쌓인 설경이 운치 있지만, 역시나 월류봉은 달이 떠야 제멋이다. 어둑해지면 달이 이 멋진 그림 속에 슬그머니 등장한다. 월류봉 뒤에서 둥실 떠오르더니 시간 지나면서 봉우리들을 하나씩 타고 옆으로, 옆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굼뜬 달의 이동이 한겨울 아침 이불 속에서 게으름부리는 어린아이 닮았다. 이 앙증맞은 움직임에 절로 미소 짓게 된다. 마음은 이미 달빛처럼 환하다.
달 뜨면 풍경은 3D영상이 된다. 달빛 받은 바위봉우리가 입체적으로 보이는데 이거 참 환상적이다. 자신을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달이 선사하는 선물이다. 조선 후기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한 눈에 반한 풍경도 바로 이거다. 그는 32세에 월류봉 옆에 작은 서재 짓고 달빛 아래에서 학생들 가르쳤다. 43세까지 11년을 달과 함께 머물렀다. 나중에 이 서재가 있던 자리에 그를 기리는 한천정사가 들어섰다. 월류봉 일대 여덟 경승지가 이곳 이름을 따서 한천팔경이라 불린다. 마을 입구 안내판에 이것들 위치 잘 표시돼 있다. 조선시대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은 고려시대에 원촌에 심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 주변의 여덟 경치가 아름답다고 전하고 있다. 심묘사가 있던 곳이 월류봉 인근이다. 이러니 이 일대 아름다운 경치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유명했다. 한천정사와 우암 송시열 유허비가 마을 입구에 지금도 있다.
저 꼭대기에 달은 무얼 숨겨 놓은 걸까. 월류봉에 올라보면 달이 밤마다 이곳으로 놀러 오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봉우리 타고 노는 재미 말고, 달이 꼭꼭 숨겨 놓은 볼거리가 또 있었다. 한반도 빼닮은 그림이다. 월류봉 정상에 오르면 초강천이 휘어져 흐르며 만들어내는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보인다. 강원도 영월에도 이런 지형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한반도 닮았다. 영월의 것에는 멀리 공장 굴뚝 보이지만, 이곳엔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다. 맞다. 달은 밤마다 여섯 개의 봉우리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한반도 모양의 그림 구경하며 놀다 갔다. 원촌마을 반대편, 에넥스 황간 공장 옆 등산로를 따라가면 월류봉 정상에 닿는다. 편도 30여분 거리지만, 경사가 급해 만만히 볼 일은 아니다.
달뜨는 시간, 매일 다르다. 달 보러 나설 때는 이 시간 챙겨야 한다. 그렇지만 달 보지 못한다고 해도 섭섭해 할 이유 없다. 달 뜨기 전, 별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밤풍경도 심장 멎을 만큼 멋지니 그렇다.
● ‘호랑이 산신령’ 머무는 반야사
월류봉 온 김에 반야사는 들러본다. 황간면 우매리 백화산 기슭(실제 절이 있는 자리는 지장산 자락이지만 무슨 연유인지 백화산 반야사라 이름 붙여 놓았다)에 있는데 월류봉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다. 신라의 고찰인데 한국전쟁 이후 대부분의 가람들이 다시 세워졌다. 이 절집에 가면 정묵당 지붕 위를 유심히 봐야한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마당 가로질러 정면으로 보이는 가람이 정묵당이다. 산 사면에 돌무더기가 산재해 있는데, 이 모양이 꼬리를 치켜 든 호랑이 형상이다. 언젠가부터 생겼다는데, 희한하게도 이 자리에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자라지 않는단다. 이러니 나무 울창한 여름이면 호랑이 형상이 아주 또렷하다. 사람들인 이를 두고 산신령이 호랑이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다. 기도 효험도 좋다고 알려졌는데, 마침 새해 벽두인지라, 두 손 모으고, 머리 조아리며 ‘호랑이 산신령’께 한해의 안녕 빌어본다. 경내는 정갈하고 단출하다. 극락전 앞 삼층석탑(보물1371호)은 간결한 멋이 가득하다. 수령 500년이나 된 베롱나무 두 그루가 탑을 호위하듯 서 있다.
문수전도 봐야 한다. 수십미터 높이의 아찔한 절벽 위에 지어진 가람이다. 정묵당 뒤로 개천(석천)을 따라 5분쯤 걸어가면 문수전 가는 계단이다. 대웅전 옆 등산로를 따라서도 문수전까지 갈 수 있지만, 물길 따라 가는 이 길이 더 멋지고 볼 것도 많다. 방생 장소로 유명한 수월대를 지나고, 조선 세조가 목욕한 후 피부병을 고쳤다는 영천도 볼 수 있다. 문수전에 서면 백화산 자락 준봉들이 만들어내는 장쾌한 풍광을 볼 수 있다.
절 구경 다 하고 돌아 나올 때는 개천 다리 건너 해수관음상 방향으로 걸어 가 본다. 겨울 강변 풍경이 참 예쁘고,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도 호젓하다. 템플스테이 할 때 명상하며 걷는 길이란다. 민초들의 바람이 차곡하게 쌓인 돌탑이 강변에 지천이다. 기도가 많으니, 세상살이 여전히 퍽퍽한가 보다. 간절한 기도들이 포개진 그 위에 돌멩이 하나 더 쌓고 돌아 나온다.
● 달밤의 황홀한 풍경…강선대
양산면 봉곡리에 있는 강선대로 간다. 금강 굽어보는 우뚝한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인데, 달 보기 좋은 곳이다. 멀리서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정자 위에 서면 강물이 거칠게 부딪치는 바위 절벽이 아찔하다. 이 위에 늙은 소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으니 운치가 제법이다. 강물과 노송과 바위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영동군 문화관광해설사의 자랑처럼 ‘삼합’이 잘 맞다.
강선대 아래는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던 곳이라고 예부터 전한다. 그 만큼 물 맑고, 경치 빼어나며, 비밀의 공간처럼 꼭꼭 숨겨져 있었다는 말일 거다. 달은 밤하늘에도 뜨고, 고요한 강물에도 떴을 거다. 물소리, 바람소리는 또 어찌나 청명했을까. 이런 가을 달밤의 황홀한 풍경이 선대추월(仙臺秋月)이다. 달빛 아래, 뽀얀 살결 드러내고 몸을 씻는 선녀를 상상해본다. 서정적이고 또 조금은 관능적인 풍경. 이를 훔쳐보던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것도 잊고 바위가 된다. 이 용바위는 아직도 강물 한 복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다. 옛 선비들이 이런 즐거움을 몰랐을까. 그래서 정자 짓고, 시 한 수 읊조리며 한밤을 보냈을 거다.
양산면 일대에도 빼어난 여덟 경승지가 있다. 양산팔경이다. 이 가운데 강선대가 깃든 풍경이 2경이다. 그러나 아름답기로 따지면 으뜸이라 해도 손색없다. 비록 옛 정자는 없어지고, 1950년대 새로 지어진 정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당시의 운치와 풍류는 지금도 여전하다.
금강 건너 보이는 곳이 캠퍼들에게 잘 알려진 송호리 송호국민관광단지다. 100년 넘은 1만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니 캠핑하기 딱 좋다. 숲은 여름이면 북적거렸을 곳이지만, 지금은 산책하기 그만일 정도로 고요하고 한갓지다. 이른 아침 금강에서 물안개라도 피어 오르면 우아한 멋이 훨씬 더 하다.
●달 떠오르는 월이산과 옥계폭포
전남 영암 월출산은 달 뜨는 산이다. 영동에도 ‘달이 떠오르는 산’이 있다. 영동과 옥천의 경계에 솟은 월이산이다. 월이산의 순 우리말이 달이산. 이를 풀이하면 달이 떠오르는 산이 된다. 이 산의 남쪽 끝에 그 유명한 옥계폭포가 있다. 이 땅 출신의 악성(樂聖) 난계 박연이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다는 폭포다. 조선 세종 때의 음악가로 악기를 개량하고 음계를 조정했으며 궁중 음악을 정비하고 우리나라 고유 음악의 토대를 튼튼히 한 그다. 난계는 이 폭포 아래에서 피리를 즐겨 불었단다. 어느날 그가 폭포수 아래에서 피리를 연주하다가 바위틈에 핀 난초를 보고 매료됐다. 난초의 ‘난’, 시내의 ‘계’를 써서 ‘난계’를 호로 정했다고 전한다.
약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기도 한다. 이럴 때면 ‘비단자락 드리운 듯 곱고 신비로운’ 물줄기와 오색물보라는 볼 수 없지만, 선계를 방불케 하는 장엄함은 가늠하기 충분하다. 난계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혼을 빼놓은 풍경이다.
옥계 폭포는 음기가 강한 음폭이다. 언제부터인가 폭포수 내리 꽂히는 그 아래 우뚝 솟은 양바위가 생겼고, 이 물로 목욕하면 아이가 들어선다고 전한다. 폭포 앞 안내판은 “불임인 분들은 오셔서 소원을 이루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옥계폭포 가면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걸어간다. 고즈넉한 저수지도 나타나고, 호젓한 오솔길도 지난다. 폭포를 보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등산도 해 본다. 몸도 마음도 참 맑아진다.
●여행메모
△월류봉 정상으로 가려면 황간면 에넥스 황간공장 뒤쪽 등산로를 이용해야 한다. 정상까지 왕복 약 1시간 30분 걸린다. 월류봉을 포함해 여섯 개 봉우리 종주를 할 수 있다. 왕복 약 2시간 30분 거리다. 정상까지 경사가 가파르다. 눈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경우 아이젠을 챙겨 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야간산행은 자제하는 것이 낫다.
△달 뜨는 시간은 매일 달라진다. 한국천문연구원 홈페이지(www.kasi.re.kr)를 참고하면 원하는 지역의 월출시간을 알 수 있다. 정월 대보름인 2월 14일(음력 1월 15일) 충북 영동지방의 월출시간은 대략 오후 5시 40분이다.
△월류봉과 반야사가 있는 황간면에는 올뱅이(올갱이ㆍ다슬기) 해장국을 파는 음식점들이 많다. 금강과 그 지류에서 잡은 것들로 만든단다. 황간면 소재지 안성식당(043-742-4203)에서 올뱅이 국밥 1인분 7,000원, 올뱅이 비빔밤 8,000원에 먹을 수 있다. 황간면 소재지 일대에 식육식당도 많다. 강선대가 있는 양산면 금강변에는 어죽과 민물고기를 동그랗게 돌려 담아 조린 ‘도리뱅뱅이’를 파는 음식점들이 많다. 가선리의 가선식당(043-743-8665)이 유명한데 어죽 한 그릇 5,000원, 도리뱅뱅이 한 판에 8,000원에 판다.
△월류봉이 있는 원촌마을에는 민박집이 몇 곳 있다. 영동읍내에 모텔들이 많다. 월류봉에서 영동읍내까지 차로 약 20분 거리다. 영동군청 문화체육과 (043)740-3205
영동=글ㆍ사진 김성환기자
한국스포츠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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