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개회한 2월 임시국회 일정을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카드 개인정보 대량 유출을 따질 국정조사와 청문회 동시 실시는 이례적이지만 국민들 관심으로 볼 때 적절하다. AI 대책과 '의료 영리화' 법안, 기초연금법 논의도 의당 할 일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국가기관 대선개입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검 논의가 쏙 빠졌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여야 지도부가 국회 정상화 조건으로 "특검의 시기와 범위는 계속 논의한다"고 한 합의는 휴지조각이 됐다. 특검이 아킬레스건인 새누리당이 모르쇠로 나오는 건 그렇다 치자. 불과 열흘 전 특검 도입에 노력한다며 손잡은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도대체 뭔가. 슬며시 특검 논의가 사라진 데 대해 일언반구 해명도 없다.
야당이 책임을 방기하는 사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국기문란 사건들은 흐지부지돼가고 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해온 검찰 특별수사팀은 사실상 해체되다시피 했다. 수사팀장과 부팀장을 경질한 데 이어 평검사들은 지방으로 발령 났다. 서울을 오가며 공판과정에 참여하면 별 문제 없다는 게 검찰 주장이지만 공소유지에 차질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하다. 검찰은 기소한 121만 건의 트위터 글에 대해 일일이 작성자를 소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대선개입 혐의를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 20여명에 대한 처벌 수위는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법무부의 지능적인 공소유지 방해 아닌가.
'사초'를 선거에 이용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사건은 면죄부 발급용 수사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관련자 전원에 대한 무혐의 방침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수사는 진작에 마무리해놓고 쉬쉬하면서 발표시기만 눈치보고 있다고 한다. "정보지(찌라시)를 근거로 한 보고서를 받아 유세에서 이야기했다"는 새누리당 의원의 코미디 같은 진술을 검찰이 어떤 논리를 들어 비호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채동욱 찍어내기'의 주체를 가려줄 채 전 검찰총장의 관련자료 유출 사건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청와대 행정관은 진작에 범행을 실토했지만 청와대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 시기를 놓쳐버린 때문이다. 청와대를 의식한 몸 사리기는 사이버사령부 대선개입 수사도 다르지 않다. 연제욱 청와대 국방비서관이 사이버사령관 재임 당시 대선개입에 관여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군 당국은 무혐의 처분했다.
지방선거를 눈 앞에 둔 민주당은 '우(右)클릭'에 여념이 없다.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꾸느니, 대기업 포용 정책을 채택하느니 하며 떠들썩하다.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등 정치개혁안도 내놨다. 안철수 신당 출범으로 자칫 구(舊)정치세력으로 몰려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표출로 보인다. 여야 양자구도가 아닌 3자 구도에서 정권심판론만으로 차별화를 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정치 혁신을 통해 지지층의 외연을 넓힐 수 있다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민주당이 여론조사에서 바닥을 기는 이유는 좌(左)편향이나 정치 개혁안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1야당으로서의 존재감 상실, 대안능력의 부재가 더 큰 원인이다. 목소리만 높였지 뭐 하나 눈에 띄는 결과물 하나 얻어낸 것이 없으니 지지와 신뢰를 얻지 못하는 거다. 안철수 측도 새정치라는 말만 요란했지 정권 비판이든, 민생 챙기기 등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헌정 질서가 유린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데도 야당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정권의 소통부재는 여전하고 복지공약 후퇴, 천문학적인 가계부채 등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할 것들이 널려있는데 세력다툼에만 골몰하고 있다. 역대 지방선거는 대부분 정권심판론이나 중간평가 성격을 띠었다. 2010년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겨냥했고, 2006년에는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권 무능 심판론을 이슈로 내세웠다. 결과는 모두 야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야당의 존재 가치는 정부와 여당의 독주를 견제할 때 살아난다. 야당은 야당다워야 한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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