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 사회부장 jaylee@hk.co.kr
역시 삼성이 하면 달랐다. 알맹이 말고 파장 말이다. 삼성이 신입사원 채용제도 개편의 하나로 추진한 대학 총장 추천제가 ‘삼성식 대학 서열화’란 거센 비판에 부딪치자 28일 개편안을 전면 백지화했다. 지난 15일 개편안 발표 당시 삼성의 설명대로 ‘열린 채용’으로 한껏 포장해 전했던 상당수 언론들도 머쓱해졌고, “능력 중심 사회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환영했던 한국대학교육협의회(4년제 대학 협의체)도 대학별 할당 인원을 통보 받고는 뒤늦게 ‘대학 줄세우기’ 논란에 가세하며 체면을 구겼다.
결국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현실, 뭘 해도 삼성이 하면 (알맹이 말고 파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더 생생하게 드러났다. 일개 기업의 채용 실험 실패를 그저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뒷맛이 너무 씁쓸한 이유다.
총장 추천제는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명분과 달리 애초부터 한계가 명확했다. 추천=채용이 아니라 서류전형을 면제해 바로 삼성직무적성검사(SSAT) 응시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SSAT에 매년 20만명이 몰리며 빚어진 ‘취업 사교육 과열’ 논란을 해소하고 연간 100억원이 넘는다는 채용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 서류전형을 부활시키면서 그 일부를 대학에 떼어준 것에 불과했다. 취업률에 목매는 대학으로서는 남은 관문을 너끈히 통과할 이른바 ‘스펙’ 좋은 학생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모의 SSAT를 치러 추천자를 선발한다는 계획을 밝힌 대학도 여럿이다. 딱 잘라 말하면 ‘채용 절차 하청’인 셈이다.
물론 추천제 자체는 잘만 활용하면 스펙 따위로 재단할 수 없는 귀한 인재를 발굴할 수 있는 제도다. 삼성의 속셈에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각 대학이 어떤 잣대와 방식으로 추천 명단을 내 놓는지 보고 ‘내 멋대로 대학 순위’를 매겨 보자는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그 즐거운 상상은 삼성이 대학들에 보냈다는 ‘추천 안내문’을 보는 순간 망상으로 끝났다. 보도에 따르면 삼성은 기본 자격으로 ‘4학년 1학기까지 취득평점 4.5만점에 3.0 이상(저소득층 2.5 이상), 토익스피킹 이공계 4급 이상, 인문계 5급 이상’을 요구했다. 또 추천 대상으로 ▦전인적 인격을 갖춘 인재 ▦매사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인재 ▦미래 삼성의 기둥이 될 성장 가능성 있는 인재를 제시했다고 한다. 여느 기업들이 채용 공고 때 내놓는 수치 커트라인과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인재상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창의적 인재를 구하는 것처럼 생색만 낸 꼴이다.
대학과 여론의 비판과 반발은 주로 대학별 할당 인원에 따른 서열화 조장, 특정 지역과 여대 등에 대한 차별을 겨냥했다. 삼성은 이런 민감한 뇌관을 건드린 탓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입시 배치표로 굳어진 기존 서열대로 혹은 모든 대학에 똑같이 추천 인원을 할당했다면 문제가 없었을까. 대학들이 정작 따졌어야 할 것은 추천이란 허울 안에 감춰진 ‘구닥다리 인재관’과 취업률에 출렁일 수밖에 없는 대학의 처지를 교묘하게 이용한 ‘채용 하청’ 속셈이 아닐까. “대학 사회가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삼성 체제에 종속될 뿐”이라는 임재해 안동대 교수의 일갈을 곱씹게 된다.
핵심을 놓친 대학들의 대처를 지켜보며 더 큰 걱정이 든다. 대학이 자본에 휘둘리고 스스로 기업화하는 데 대한 우려가 나온 지 오래지만, 이번 일로 일등기업 삼성의 메시지를 거듭 확인한 대학가에서 그런 추세가 더 가속화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을 등한시한 대학구조조정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재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교수나 학생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시도들 말이다. 학생 수 대비 추천 할당 인원에서 수위를 기록했다는 보도자료까지 냈다는 수도권 소재 대학의 행태 등을 접하면서 절망감마저 든다. 삼성공화국의 망령이 그렇게 대학가를 집어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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