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수묵화다. 거친 질감의 한지 위에 일상의 오브제들이 붓과 먹으로 옮겨진 정물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폭에 담긴 이미지는 실사에 가깝다. 아니 물체의 질감과 윤곽은 그것의 실재인 듯 정확히 '그것'이다. 머릿속에 머물던 회화와 사진이 갖는 '다름의 경계'가 터무니없이 허물어진다. 서울 신세계 갤러리에서 2월 16일까지 전시되는 이정진의 'THING' 시리즈는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물건들을 촬영한 후 작가가 수작업을 통해 한지 위에 회화처럼 이미지를 재창조한 작품들이다. 필름으로 공간 이동한 사물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분명 사진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지라는 다른 차원으로 옮긴 후 작가의 상상력을 '붓칠'로 가미했다는 점에선 회화인 셈이다.
'THING' 시리즈는 작가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과 미국 뉴욕을 오가며 숟가락, 가위, 다리미, 콩, 의자 등 일상의 사물을 근접 촬영한 후 필름의 이미지를 한지에 확대 프린트하고 감광유제를 붓으로 칠해 현상하는 기법으로 만든 18점의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주 피사체만을 남기고 배경과 그림자를 오롯이 지워낸 후 정물의 콘트라스트(명암대비)를 인위적으로 강조하고 배경이 있던 자리는 여백으로 비워 관람객의 시선이 오직 정물에 머물도록 했다. 단순한 종이가 아닌 한지를 이용함으로써 정물의 이미지가 갖는 질감이 더욱 원초적으로 살아나게 한 효과를 더했다.
이정진은 1990년쯤부터 국내 사진작가 가운데 가장 먼저 한지를 이용한 사진 작품을 선보였다. 그림과 글씨, 그리고 여백으로 완성되는 수묵화와 닮은 그의 작품은 그래서 매우 동양적이고 해외 작가들에게선 보기 어려운 풍조다.
'THING' 시리즈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물들은 관람객의 시선과 평행하게 정면을 바라본다. 마치 화폭을 벗어나 존재하는 공간을 예고하듯, 정물은 간혹 불규칙하게 잘려있고 여백은 광활하거나 예상 밖의 공간, 예를 들어 정물의 아래쪽 등으로 놓여있다. 한지 테두리는 거칠게 뜯겨나간 그대로를 살려 놓아 이 또한 작품이 숨 쉴 공간을 이룬다.
사진과 회화의 교집합 안에 남겨진 듯한 그의 'THING' 시리즈는 이처럼 여백과 확장의 이미지와 더불어 이른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자유로움을 성정으로 내포하고 있다. 각 작품은 피사체의 정체를 시각으로 분명 확인할 수 있음에도 생경한 번호로 구분될 뿐이다. 시리즈의 명칭인 'THING'이 갖는 '물체'라는 매우 보편적인 의미처럼 그의 오브제는 개별적인 이름을 갖지 않는다. 작가는 그래서 "잘 된 작업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작업을 의미한다"며 "관객들이 서로 다른 이미지를 생성할 때 제대로 작품이 이해됐다고 본다"고 종종 말한다. 작가와 물체 본연의 특징이 부과한 명칭이 아닌 관람자의 감각이 부르는 이름이 다양하게 나타날 때 필름으로 현상된 사진의 에너지가 가장 활활 타오른다는 말이다.
'THING' 시리즈에 등장하는 피사체들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투박하며 특별하지 않다. 작가는 명상 중 눈에 갑자기 들어온 작은 항아리, 생명력을 잃고 뽑혀 나온 녹슬고 굽은 못, 언제부터인지 작업실에 놓여있던 나무의자, 보는 이에 따라 돌멩이로도 쌀알로도 비치는 콩, 솥을 닦던 나무뿌리 뭉치 등에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신세계 갤러리 큐레이터 김윤정씨는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작가가 붓으로 감광유제를 도포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필름일지라도 온전히 동일한 작품을 재차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에디션이 많지 않다"며 "이런 의미에서 사진이 갖는 복수성을 흔들어놨다고 볼 수 있으며 예술 장르가 갖는 한계를 부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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