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1] 제시문 [가]~[라]를 비슷한 내용끼리 분류하고, 요약하시오.(501자 이상∼600자 이하ㆍ배점 40점)
[제시문 가]
인터넷이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는 소통 환경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곧 실제로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접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정보만을 선택하고 자신의 견해와 동일한 의견만을 선별적으로 접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네티즌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생각과 의견을 가진 네티즌들과 집단이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서 네티즌은 자신이 읽고 싶은 정보만을 골라 읽고, 듣고 싶은 의견만을 선택하여 듣고, 자신과 비슷한 취향과 견해를 지닌 사람들만 만나 소통하면서 집단 정체성(group identity)을 공유하고 그 집단으로부터 사회적 도덕적 지지(moral and social support)를 획득한다. 이런 상황은 인터넷이 다양한 정보와 견해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었기에 실현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기존의 생각이나 태도와 부합하는 의견만을 골라 접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like-minded people)끼리 만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 만족감 그리고 즐거움을 얻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개인의 자아실현 및 권리증진 차원에서만 본다면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숙의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정보와 의견의 편식으로 인해 편견과 고정관념이 강화될 수 있고,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포용력이 약화되며, 사회의 파편화를 심화시키고 집단 극화(集團極化ㆍGroup Polarization)를 일으킬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숙의와 사회 통합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평소에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지닌 무리하고만 지낸 사람은 자신이 보유한 의견의 정당성을 더욱 굳게 믿게 되며, 그 결과 반대 의견의 타당성이 드러났음에도 그 의견을 인정하거나 포용하는 데 인색한 경향을 보인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인터넷 공동체는 마치 울림방(echo-chamber) 같아서 자유롭게 소통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의견만을 반복적으로 듣게 된다. 울림 효과는 보강 효과로 이어지고 구성원의 편견과 아집은 더욱 견고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과의 건전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제대로 이끌어 내기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유유상종의 원칙에 따라 모인 집단 내의 소통은 기존 의견의 극단화를 초래함으로써 집단 극화 현상을 발생시킬 우려가 있다.
이렇듯 파편화된 집단 내의 유유상종식 소통은 집단 내 의견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인터넷상에는 이런 상호 대립적이며 이질적 집단들이 다수 존재하므로 집단 간의 의견 다양성은 오히려 증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집단 간에는 다양성의 풍요가, 집단 내에서는 다양성의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적 소통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제시문 나]
부산의 한 동네. 아이들이 하교한 빈 교실에 막 퇴근한 엄마·아빠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협동조합 방식으로 공동주택을 짓는 중이다. 입주할 집의 마감 공사를 앞두고 이날도 입주민 회의, 아니 조합원 회의가 열렸다. 공동주택 이름은 ‘일오집’. ‘14+1’에서 따왔다. 14가구가 모여 살면서 1채의 공동 공간을 함께 꾸려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얼핏 평범한 빌라처럼 보이는데, ㄷ자형으로 배치된 건물 가운데 330㎡(100평) 가까이 넓은 공간이 비어 있는 게 색다르다. 주차장일까? 아니다. 아이들이 뛰놀게 될 마당이란다.
이 집의 특징은 또 있다. 건물 두 채에 들어설 열네 집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실면적 기준으로 46㎡(14평)에서 106㎡(32평)에 이르기까지 규모부터 제각각이다. 중대형 아파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좁게 느껴질 수 있는 평수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 공간(집)을 조금 좁게 쓰는 대신 1층에 배치할 공동 공간(커뮤니티실, 창고 등)은 넓게 쓰자는 것이 이들의 기본 구상이기 때문이다. 대신 개인 공간은 한껏 개성을 살렸다. 복층 구조를 갖춘 집이 있는가 하면 하늘로 뚫린 창(천창)을 낸 집, 테라스를 거실과 부엌 사이에 둔 집 등 구조와 설계가 제각각이다.
기존 공공주택은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지어져 왔다. 뉴타운이건 임대 주택이건 마찬가지였다. 마을과 이웃이 사라진 자리, 건설사가 분양한 주택에 입주한 사람들은 낯선 주거지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콘크리트 벽을 맞댄 채 살아가야 했다.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협동조합은 다르다. 서로 몰랐던 사람들일지라도 집을 짓겠다고 모여 부대끼는 과정에서 ‘관계’를 만들어가게 된다. ○○○ 씨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속한 대연동이라는 마을 또한 소중하다”라고 말했다. 정든 마을과 이웃이 있어야 진짜 좋은 집도 가?求募?것이다.
협동조합 방식으로 집을 짓게 되면 건설사의 일방적 드라이브도 불가능해진다. 조합원이 원하는 설계·자재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집, 커뮤니티가 살아 있는 집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집에 저당 잡혀 사는 삶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막상 집을 재산 증식의 도구로 보는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이들은 앞으로 제2, 제3의 일오집을 통해 새로운 집의 비전을 제시하고 싶어 한다.
[제시문 다]
모든 과도기적 현상들, 적응과 부적응, 선도와 지체의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현시대가 지향해 가고 있는 발전의 방향은 가정, 직장, 사회, 국가, 그리고 전세계적 수준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개인성과 공동체적 시민성의 동시적 신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혹자는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성의 신장이 개인화된 전자 미디어 보급과 맞물리면서, 가족 구성원 간의 고립감과 사사화(私事化ㆍprivatization)된 생활양식, 즉 “이중적 사사화(double privatization)”를 가속화시키거나, 공적 생활과 단절, 자신에만 몰두하는 “사회적 파편화(social segmentation)”의 어두운 모습으로 이어질 것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개인성과 공동체적 시민성의 관계를 수평선상의 대립적인 양극 관계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성과 공동체적 시민성은 건강하면서도 자기 조절적인 자아에 토대를 둔 집단 정체성과 사회적 네트워크가 실현되고 이것이 다시금 하나의 주체적 개인이 탄생되는 것으로 이어지기 위한 상보적 조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개인성의 확장과 공동체적 시민성의 신장은, 점차 개선되는 노동 및 삶의 조건, 그리고 정보화 추세 속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받고 수평적 연대를 만들어 가는 등권적인 다원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추세들은 카스텔의 표현을 빌리자면,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networked individualism)”로 요약된다. 이는 주체적 개인의 탄생과 동일한 개념으로, 하나의 집단이 파편화된 개인으로 깨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체계의 수직적 권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함과 동시에, 건강한 집단 정체성의 생산과 수평적 네트워크의 확장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회 구성원으로 발전해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시문 라]
도시의 역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한 가지 특징만은 변함이 없다. 그 어떤 도시들도 결국 낯선 사람들끼리 서로 밀접하게 머물면서 활동하는 공간이라는 점 말이다. 끊임없이 낯선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쉽게 다가설 수 있을 정도로 그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든 도시 거주자들의 생활에 엄청날 정도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확실성을 안겨준다. 다시 말해 이처럼 낯선 사람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수많은 불안의 원천이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분출될 수 있는 수많은 공격성의 원천이기 도 한다.
또한 낯선 사람들은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 느끼던 공포들을 배출할 수 있는 편리하면서도 유용한 수단을 준다. 우리는 우리 집과 우리가 사는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을 쫓아냄으로써 불확실성에서 유래하는 불안감이라는 무서운 유령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떨쳐내려 한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더 나은 공동생활의 양식을 찾는 일에 전적으로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도 하나의 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가 바로 ‘믹소포비아(Mixophobia)’다. 믹소포비아, 즉 뒤섞임에 대한 공포증(이질 공포증)은 다양성과 차이로 가득한 바다 한가운데에 유사성과 동일성으로만 이루어진 섬들을 세우려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믹소포비아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 때문에 생겨난다. 어쩌면 “서로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표현하는 ‘우리’라는 그 감정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더 깊이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회피하게 하는 방식”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그 감정은 어떤 정신적 안정감을 보장한다. 실제적인 참여 활동을 회피하려는 욕망은 본래부터 공동체라는 통일된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에 내재해 있다. 공통된 경험도 없이 서로 공통된 유대감을 느끼는 일은 우선 사람들이 참여 활동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그 활동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위험성과 모험을 두려워하면서 그 활동이 가져올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이처럼 “유사성을 지닌 공동체”를 추구하려는 충동은 사실 단지 외부에 있는 나와 ‘다름(the otherness)’으로부터만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요동치듯 활기 넘치며 여전히 열심히 활동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번거롭고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내부 상황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후인 셈이다.
낯선 사람들이 갈수록 더 이질적이고 익숙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면 될수록, 더구나 우리 자신들의 생활 세계 안으로 그들의 특이함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결국에는 그러한 다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상호 간의 의사소통이 점점 더 희미해지거나 전혀 진행되지 못하게 되면 될수록, 낯선 사람들은 항상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기 쉬운 법이다. 동질적이면서도 영토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어떤 환경을 마련하려는 충동은 믹소포비아에 의해 더 촉발될 수 있다. 더구나 이처럼 영토적인 분리를 생활화하는 일이야말로 믹소포비아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명 튜브이자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원천이다.
[예시답안]
제시문 등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인다. 제시문(가), (라)는 개인이 사회통합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가)의 인터넷은 개인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개인은 서로 같은 견해를 가진 타인들과 소통하며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다. 그러나 이는 정보의 편식을 증대시켜 편견을 견고하게 함으로서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극단화를 초래한다. (라)에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낯선 상황에서 생기는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 믹소포비아의 성격을 띤다. 그들은 서로를 깊이 고찰하는 대신 자신들과 유사성을 지닌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다름에서 오는 불안함을 회피한다.
반면 (나), (다)는 개인과 공동체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의 공동주택은 공동공간을 중시하는 동시에 개인공간을 개성있게 구성함으로서 공동체를 통합시킨다. 개인을 존중하며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중시해 커뮤니티를 증대시킨 것이다. (다)는 개인성과 공동체적 시민성이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시대가 이중적 사회화나 사회적 편견을 야기시켜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견해는 개인과 공동체를 양극관계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면 비판한다. (다)는 오히려 개선된 삶의 질과 정보화속에서 다원주의가 나타나며 이는 사회를 통합시키는 순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김영윤ㆍ대구 수성고 3학년
[문제 분석과 답안 총평]
경희대 인문예체능계열 논술고사 1번 문항은 제시문들을 비슷한 입장으로 분류한 후에 각각의 제시문을 따로 따로 요약하는 것이다. 수험생의 답안은 제시문들을 분류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비슷한 입장으로 분류할 수 있는 분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분류한 후 비교 내용을 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명확한 분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답안에서는 ‘제시문들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인다’는 분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준은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보다는 예를 들어 ‘사회적 관계 맺는 방식의 차이’라는 분류 기준처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시문 (가)와 (라)는 각각 인터넷과 도시 공간을 대상으로 사회적 파편화 ‧ 고립화의 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적 파편화란 사회가 너무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지고 그로 인해 사회가 통합이 되지 않고 분열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답안의 첫 번째 분류 기준에서 ‘개인이 사회통합을 저해한다’는 내용은 제시문의 내용들과는 조금은 다르다. 개인이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있지는 않다. 기술 발전과 도시 발전이 가져온 상황에서 인간들이 사회에서 맺는 관계 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뿐이다. 단순히 개인의 잘못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가)에서 ‘정보의 편식’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앞 문장에서 표현한 내용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정보와 견해만을 선택하는 경향’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줘야 ‘정보의 편식’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분류기준을 살펴 보자. 제시문 [나]와 [다]는 협동조합식 공동주택 건설 과정과 인터넷에서 개인성과 공동체적 시민성이 동시에 추구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사회적 다양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회적 다양화란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 나는 관점에서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개성과 공동체성이 발현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답안에서 ‘(나), (다)는 개인과 공동체가 공존할 수 있다’는 두 번째 분류기준도 조금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공통주택 건설이나 인터넷 소셜미디어와 같은 네트워크의 발달이 주체적인 개인성은 물론 공통체적인 시민성을 동시에 신장시킨다는 핵심 사항을 (다)와 (라)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김경석ㆍ종로학원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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