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결코 자기 품 안에 안긴 여자가 죽을 것이며, 이름만 기억하는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첫 문장부터 심상찮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아파트에서 드라마 작가이자 대필 작가인 빅토르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룻밤 사랑을 위해 근래 만난 마르타라는 여인이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다 숨을 거둔 것이다. 여인의 남편은 영국으로 출장 간 상태고, 옆 방에선 그녀의 두 살배기 아들이 자고 있다. 화자는 죽어가는 여자를 보며 셰익스피어의 에 나오는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네 무딘 칼을 떨어뜨려라'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이 대사는 귀신처럼 작품 내내 주인공 주위를 맴돈다.
소설의 도입부만 읽어도 스페인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하비에르 마리아스(63)의 스타일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혼란에 빠진 빅토르의 의식을 현미경으로 분석하듯 천천히 따라간다. 마르타의 죽음 외에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도 빅토르가 자신의 존재를 지운 뒤 아파트를 빠져나올 때까지 확인하려면 80여쪽을 더 읽어 내려가야 한다. 깊은 성찰과 사유를 보여주는 흐름 속에 화자의 존재론적 불안이 책장을 튀어나올 기세로 꿈틀거린다.
예측불허의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마르타의 가족은 그녀가 죽을 때 누군가 같이 있었다는 걸 눈치 채고 빅토르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마르타의 아버지, 여동생 루이사, 남편 데안을 차례로 만난다. 어느 날 빅토르와 마주친 마르타의 아들이 그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다. 빅토르는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루이사와 데안에게 사실을 고백한다. 데안의 반응은 다소 뜻밖이다. 그가 준비한 건 복수가 아니라 '고백'이었다.
스릴러 형식을 띤 철학소설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기억과 망각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1994년 펴낸 소설을 통해 확실한 것과 존재하는 것 너머의 추측하거나 가정할 수 있는 것,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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