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으로 된 이 책은 옮긴이와 옮기는 과정에 훈수를 둔 이의 후기(들)까지 해서 모두 900쪽이 넘는다. 두툼한 장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유독 길었다. 두어 달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래의 난독 증세를 감안하더라도 그건 드문 일인데 이 두어 달의 시간 속에는 지독한 기복, 혹은 불균형이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50쪽 가량 되는 서문과 프롤로그를 돌파하는 데 소요됐다. 그러나 '제1일 1시과'에서 시작돼 '제7일 한밤중'에 끝나는 나머지를 읽는 데는 채 사흘이 안 걸렸던 것 같다. 뇌의 탄력성을 확인케 한 책이다. 지은이는 지난 세기 자신의 이름을 글로벌 브랜드로 만든, 움베르토 에코다.
읽어 봤다면 아마 비슷한 기복을 경험했을 듯하다. 그건 서너 줄의 프로필로는 머릿속에 든 것의 윤곽을 그려낼 수 없는 박람강기의 박학자인 지은이가, 댓바람에 교부철학과 13세기 스콜라티시즘과 초기 르네상스의 자연과학, 거기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치까지 트럭째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에 두루 무학자인 까닭에, 그런 프롤로그는 내게 책을 봉인하고 있는 결계 같았다. 하지만 한 번 결계를 뚫고 나자 빨려 들었다. 비늘처럼 흩뿌려진 단서들을 추적해 인과의 뼈대를 세워 가는 과정이 대단히 긴박하고 치밀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독서라는 행위가 도락이 될 수 있는 장르의 대표적 특징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추리소설이다.
대단한 재미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역설적으로 그 재미와 완성도 탓에 이런 의문을 갖게 했다. 왜 세기적 석학이 2년 반을 추리소설을 쓰느라 골몰했을까. 책날개의 저자 소개에-이를테면-답이 나와 있다. '50세가 되었을 무렵, 에코는 현대 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소설로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출판사에 근무하던 여자 친구로부터 추리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 간략한 이야기를 단박에 '답'으로 받아들이는 건 책에 등장하는 14세기 가톨릭 세계 청빈논쟁을 주석을 읽지 않고 이해하기보다 어렵다. 일단 접어두고, 책의 내용을 다시 잠깐 들여다보자.
1327년 희귀 고문서로 가득한 이탈리아 북부의 수도원. 묵시록의 예언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수도사들이 하나씩 시체로 발견되고, 수도원장은 손님인 윌리엄 수도사에게 사건의 조사를 맡긴다. 윌리엄은 그 죽음의 배후에 어른거리는 광기의 실체에 다가서게 되는데, 그 광기는 다름아닌 믿음의 이름으로 세상에 퍼져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897쪽)
새로 읽으며 그 아랫부분에도 밑줄을 쳤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인류의 모든 시간에 편재하는 폭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 에코가 중세 수도원의 미스터리를 짜내느라 머리를 싸맨 목적은 그게 아니었을까.
다음과 같이 협소하게 읽어내는 건 마땅히 피해야 할 왜독(歪讀)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런 독후감을 붙인다. 스스로를 '정의'라고 광신하는 자들이 선지자의 표정으로 권좌에 앉아 타인을 '비정상'으로 매도하고 배제하는 오늘, 위의 인용문은 우리 스스로를 경계하는, 그리고 다독이는 말로 읽어봐도 되지 않을까. 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라는 코너에 몰아넣기 위한 견강부회였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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