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 핑계 대면서 체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체벌을 금지한 조례보다 초중등교육법이 더 상위다. 이 법에는 선생님이 필요한 경우 학생을 마음대로 지도할 수 있게 돼 있다."
수도권의 한 고등학교 생활지도부 교사는 반복해서 지각한 학생들에게 '한 번만 더 지각을 하면 운동장 오리걸음을 돌겠다'는 각서를 쓰라며 이렇게 말했다. 각서를 쓰지 않으면 '지시 불이행'으로 벌점을 줘서 징계를 하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말까지 했다. 이렇게 반강제로 각서를 쓴 학생들이 한 반에 5, 6명 꼴이다. 이 학교 1학년 A양은 "기분은 나빴지만 각서를 안 쓸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A양은 "부모님이 '오리걸음을 시키면 치마를 입었으니 다른 벌을 받겠다고 해라'고 했지만 안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징계를 할듯한 분위기인데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한 어떻게 거부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시행 2주년(26일)을 맞았지만 교육부와의 갈등,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의 개정안 추진으로 학교 현장의 혼란이 적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교육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학생인권조례 무력화에 나선다는 비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2012년 시행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체벌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을 금지'했고, 2010년 경기학생인권조례도 '학교에서 체벌은 금지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교육부는 2011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도구나 신체 등을 이용한 직접체벌만 금지하고, 오리걸음, 팔굽혀 펴기 등 간접체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간접체벌을 허용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학교에 주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초중등교육법이 간접체벌의 금지는 명시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시ㆍ도교육청에 맡겨져 있다고 봐야 한다"며 "초중등교육법-학생인권조례-학교규칙의 단계에서 학교는 조례를 따르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이뿐만 아니다. 서울의 한 여고는 두발ㆍ복장 자유를 못박고 있는 학생인권조례 시행 이후에도 이를 제한하고 있는 학칙을 개정하지 않았다. 이 학교 3학년 B양은 "매일 아침 교문지도를 하고, 두발 단속을 해서 학생들이 '왜 학생인권조례를 따르지 않느냐' '왜 학칙을 바꾸지 않느냐'고 했지만 묵살했다"고 하소연했다. 서울시교육청은 2012년 조례 공포 후 일선 학교에 학칙을 제ㆍ개정하라고 했지만 교육부가 장관 권한으로 이를 정지시켰다. 같은 해 4월에는 두발ㆍ복장 등 용모와 교육목적상 필요한 학생의 소지품 검사 등을 학칙으로 정할 수 있도록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를 개정했다. 지난해 3월 두발 복장을 규제하도록 학칙을 개정한 서울 송파구의 한 고등학교 3학년 C양은 "선생님께 학생인권조례를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조례보다 초중등교육법이 더 위라면서 어물쩍 넘어갔다"고 말했다. 아예 학칙개정을 안 하고 버틴 학교들도 있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근거로 조례 개정을 추진, 학생인권을 정착하도록 하는 것과는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달 30일 내놓은 개정안은 학교에 더 많은 권한을 주면서 학생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해 허울뿐인 '학생'인권조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필요한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의심이 있는 경우' '교육상의 필요' 등 교사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는 지적이다. 학생-교사 간 갈등의 불씨인 두발ㆍ복장의 자유를 '학생ㆍ학부모ㆍ교사의 의견을 수렴해 제ㆍ개정한 학칙으로 정할 수 있다'고 개정한 조항도 대표적이다. B양은 "학교에서 올해 새 학기에 학칙을 개정한다고 하는데 개정안을 빌미로 그나마 보장됐던 인권마저 제한하려고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노원구의 한 여고에 재학 중인 D양은 "으레 입시 위주인 고등학교에서 학급회의는 허울뿐이기 때문에 학칙 개정을 하면서도 학생의견 수렴이 전혀 안 됐다"며 "나중에 선생님께 따지니 '학생 대표의 얘기를 들었다. 절차상 문제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학교장 등이 의지를 갖고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 수렴에 나서지 않는 한 많은 학교에서 규제 위주의 학칙을 만들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본적으로 학교장의 권한은 인권의 하위 개념이고 초중등교육법보다 상위법인 헌법이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라며 조례의 안착을 강조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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