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해는 백색의 능선에 걸린 지 오래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터널을 지나지 않아도 하염없이 떠오르는 설국의 화면 속으로 설피(雪皮)들이 걸어간다. 지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눈이 내리는 일본 홋카이도 내륙의 중심 토마무. 눈밭을 스치듯 지나는 설피가 자국을 남기기 무섭게 신설이 덮인다. 매년 7m에 가까운 적설 기록에 뒤지지 않게 이른 노을이 비추는 늦은 오후가 이내 눈으로 감감해진다.
세계 최고의 설질을 자랑하는 토마무의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는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길 수 있는 해발 1,210m의 슬로프 17개가 중심인 종합 놀이ㆍ숙박 시설이다. 일본은 물론 국내 스키어들도 매년 수천(2012년 기준 약 2,500)명씩 원정 스키를 타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다. 하지만 도쿄돔 213배에 이르는 광활한 호시노 토마무 리조트를 스키어와 스노보더들의 천국으로만 부르긴 충분치가 않다. 토마무산 중턱까지 설피를 신고 걸어 오른 후 따뜻한 오두막을 거쳐 눈썰매를 타고 하산하는 화이트 피크닉 프로그램은 스키 없이도 일본 최상급 스키 리조트를 원 없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여가이다.
리조트 내 어드벤처 프로그램 출발지이며 다양한 장비를 대여할 수 있는 폴라 빌리지에서 잊을 수 없는 소풍은 시작된다. 우선 피크닉을 시작하는 토마무산 등산코스 아래까지 가기 위해 4명 정도가 함께 탈 수 있는 스노래프팅에 오른다. 육중하지만 설원에 달라붙은 듯 날렵하게 달리는 스노모빌에 주로 영월 내린천 등에서 보이는 래프팅용 고무 보트가 매달려 있다. 매캐한 디젤엔진 냄새 사이로 금세 하얀 눈의 장막이 간유리처럼 눈을 가린다. 가파른 코너를 돌 때마다 살짝 들리는 눈꺼풀 사이로 이른 일몰이 시작된다. 붉은 와인을 머금은 듯 건너편 무명의 설산이 발갛게 달아오르면 순백의 설원에 날을 가다듬은 햇빛이 면도날처럼 시신경을 베어버릴 듯 날아든다. 머리에 쌓인 눈발이 녹을 틈을 주지 않는 영하 20도의 설산 속으로 스노모빌은 이내 도착했다.
모험은 이제부터다. 각자의 발에 맞는 설피를 동여매고 앞으로 나아간다. 눈에 습기가 적어 손에 쥐면 백색 초콜릿 덩어리처럼 이내 단단해지기 때문에 일명 '샴페인파우더'라 불리는 홋카이도의 눈은 허리까지 올라오는 깊이임에도 여행자의 발을 편하게 놓아준다. 30여분 설피에 의지해 나아갔을까. 눈 앞에 2평 정도 되는 넓이의 작은 오두막이 나타난다. 훈훈한 실내는 이미 타오르고 있던 화목 난로 덕분이다. 산을 오르는 길에 가이드는 가는 나뭇가지 하나씩을 꺾어오라더니 눈처럼 하얀 마시멜로를 내놓는다. 뜨거운 차 한잔과 난로에서 바싹하게 익어가는 마시멜로 냄새가 얼어붙은 몸을 간단히 녹여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뭇가지에 찔린 마시멜로를 난로 속으로 밀어 넣고 유리창에 눌어붙은 성에를 먼 시선으로 바라 본다. 돌아갈 시간이다.
가이드들이 나눠준 눈썰매는 딱 엉덩이만큼의 사이즈로 원색의 플라스틱 소재다. 어쩌란 말인가. 벗어놓은 설피를 뒤로 하고 썰매로 산을 내려가라는 말이 돌아온다. 올라온 산길이 가파르진 않지만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한 사람 지날 정도로 좁아 눈앞이 노래진다. 길을 내기 위해 가이드가 눈밭을 먼저 지친다. 순식간이다. 누군가 뒤에서 고무줄이라도 당겼다 놓은 듯, 붉은색 눈썰매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용기를 내 뒤를 따른다. 보통 국내 눈썰매장에선 속도가 붙기 전에 눈이 밀리면서 썰매가 멎어버리곤 한다. 아이들은 그래서 발을 구르며 겨우 슬로프를 내려오기 마련이다. 바싹 마른 설질 탓인지 이곳의 눈썰매는 브레이크 없는 롤러 코스터인 양 금세 속력이 붙는다. 커브에서 자칫 제어를 못하면 썰매길 밖으로 나가 떨어진다. 그래도 다칠 일은 없다. 조금 전 오두막에서 적당히 익었던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운 눈밭이 있을 뿐이다. 설피를 처음 신었던 등산로 초입에서 스노모빌 한대가 눈 언덕을 가파르게 오간다. 무슨 일인가 바라보니 이제 막 눈썰매에 재미를 붙인 이들을 위해 마지막 썰매 슬로프를 닦아주기 위해서다. 다리를 높이 들고 썰매의 속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썰매길 끝자락에는 아이들 웃음소리처럼 새하얀 해가 진다.
토마무 리조트의 동심은 일몰 후에도 잠들지 않는다. 10일 개장한 아이스 빌리지는 밤이면 체감온도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홋카이도 내륙이기에 가능한 얼음의 왕국이다. 얼음으로 건물을 짓기 때문에 적정 수준의 수은주로 기온이 떨어지지 않으면 개장 계획을 번복해야 한다. 지난해엔 숙박이 가능한 시설로 꾸미기도 했지만 밤 추위가 만만치 않아 올해엔 아이스바로 대치했다. 아무리 두꺼운 점퍼를 입었더라도 아이스 빌리지를 방문할 땐 초입에 위치한 렌털 오피스에 들려 겉옷을 빌려 입는 게 좋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털옷을 입지 않으면 한파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빌리지 안에는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교회인 아이스 채플, 꽁꽁 얼은 1회용 얼음 잔에 칵테일 등 각종 음료를 담아 파는 아이스바, 얼음 미끄럼틀이 손님을 기다린다. 숙소로 돌아오는 셔틀버스 시간을 잘 맞춰야 밖에서 떠는 낭패를 피한다.
■ 여행수첩
●홋카이도로 가는 항공편이 다양해졌다. 대한항공이 인천과 신치토세(삿포로)를 잇는 항공편을 1일 2회 운항한다. 부산-신치토세 구간은 주3회(화ㆍ목ㆍ토요일) 운항. 진에어도 인천-신치토세 구간을 매일 1회 운항한다. 인천-아사히카 구간은 아시아나가 주2회(수ㆍ토) 운항한다.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까지는 신치토세 공항에서 JR특급열차를 타면 1시간 정도(인근 토마무역) 걸린다. 승용차나 리조트 버스를 이용하면 1시간 30분~1시간 50분 소요. 아사히카와 공항은 리조트와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고속도로가 연결되지 않아 1시간 40분이 걸린다.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 한국사무소 (02)752-6207 ●홋카이도는 3월까지 지역에 따라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긴 겨울이 이어진다. 세계 3대 축제로 꼽히는 '삿포로 눈축제'가 2월 5~11일 열린다. 홋카이도 관광정보(한국어) kr.visit-hokkaido.jp
토마무(일본)=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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