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영화 이 1,000만 관객을 모았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니 눈물을 흘린 이유도 상당히 다양할 것이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의 자연인을 향한 눈물 외에도, 민주주의 투쟁의 고난에 몸을 바친 이들에 대한 연민이나, 오늘날 한국 정치의 상황에 대한 분노와 결부된 눈물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카타르시스와 휴머니즘적 감동에 근거한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1,000만의 감동' 가운데에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는 건강하지 않은 면도 있는 듯하다. 이는 영화 을 일종의 '정치 신파'처럼 만든다. 영화에서 신파적 감상의 대상은 주로 두 가지인 듯하다. 하나는'대통령 노무현'이고 또 다른 하나는'80년대'이다.
첫째, 노무현 전대통령은 오늘날 한국 감정정치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친노 대 반노'로 짜인 이 감정정치는 지난 대선과 NLL소동 따위에서 보듯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 그런 정서를 재생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는 께름칙하다. '인간 노무현''바보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정치인 노무현'을 완전히 등치 시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의 노무현팬덤 정치의 인식론이자 감정이다. 그것은 '대통령 노무현'의 사소한 오류나 흠까지 침소봉대하여 '종북'을 덧칠하고 노무현에 대해 죄의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하는 극우 수구 세력의 인식과 쌍을 이뤄 한국 정치를 수렁에 허우적거리게 한다.
'인간 노무현'은 인간미 넘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나아가 '바보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은 다른 어떤 정치인보다 멋있고 아까운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변호사 노무현'이 100% 완전한 인간이었을 리 없고, '대통령 노무현' 또한 완벽히 불완전한 대통령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은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실패했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바로 이명박과 새누리당의 집권이다.
1,000만 명이나 본 이 영화의 영향은 어디에 이를까? 만약 또 '친노 대 반노'의 정치로 수렴된다면 진정 퇴행일 것이다. 과연 누가 친노/반노의 정치 구도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가? 이 영화가 '친노 종북' 따위의 말에 결부된 저열한 인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연 '대통령 노무현'이나 노무현 정권 수준의 민주주의 너머를 사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둘째, 이 영화가 '80년대'를 기억하는 방식이 신파적이다. 신파성의 핵심은 뒤엉킨 자기연민과 죄의식이다. 신파의 주체들은, 문제상황 앞에서 '지금' 합리적 이성의 힘으로 결단하지 않고 과거를 어루만지며 머뭇거린다. 특히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에 별로 건강하거나 새롭지 않은 방식으로 대답하게 하는 듯하다. 그들/우리들이 '80년대'를 겪으며 소용됐던 진정성과 희생의 가치는 어떻게 주장되어야 하나? 자기와 자신의 세대가 당했던 고난과 희생은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수되는 것이 정당한가? 다음 세대가 처한 전혀 다른 상황과 맥락은, 어떻게 고려되어야 하나?
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회고되는 80년대는 불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특히, '자유' 민주주의나 '애국'과 엉켜 있는 도덕감정은 그야말로 신파에 불과하다. 80년대 세대는 비록 어리고 서툴렀지만, 단순히 자유민주주의자나 민족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80년대적 자유민주주의나 민족주의적 지향은 변질의 길을 걸어왔다.
요컨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주체이기도 한 486들은 자신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보다는, 차라리 왜 '486 개XX론' 같은 담론이 있는지 철저히 성찰해봐야 한다.
노무현이든 누구든 한 명의 존재는 물론 눈물과 연민의 대상 그 자체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흘릴 눈물이 아직 많이 남았다면,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이나 흘러간 자신의 '과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위해, 그리고 얼마 전 돌아가신 이남종 씨같이 '지금' 고통받는 동료 시민들을 위해 더 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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