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7일 북한 국방위원회가 전날 밤 느닷없이 내놓은 '남북간 상호 비방ㆍ중상 중단 제의'를 거부했다. 정부는 이날 김의도 통일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에서 "북한이 사실을 왜곡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계속하면서 여론을 호도하려는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이 '사실 왜곡'으로 지적한 북측 제안 내용은 크게 4가지다. 우선 "이달 30일부터 남북간 상호 비방ㆍ중상을 중단하자"는 것과 관련, "상호 비방ㆍ중상 중지 합의를 먼저 위반한 쪽은 북한"이라고 반박했다. 키 리졸브와 독수리연습 등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 요구에는 "우리 군사훈련은 주권국가가 행하는 연례적 방어 훈련"이라고 규정한 뒤 "북한은 정당한 군사훈련을 시비할 게 아니라, 과거 도발 행위에 대해 책임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하라"고 촉구했다.
또 "핵 문제의 본질은 북한의 핵개발에서 비롯된 만큼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위한 실질 행동을 보여야 한다"며 핵 재난 방지를 언급한 북측 주장을 일축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이산가족 문제는 정치ㆍ군사적 상황과 연계될 수 없는 순수 인도적 문제"라며 조건 없는 이산상봉 실현을 역제의했다.
정부가 신속하게 거부한 건 북측 제안은 유화 제스처일 뿐 진정성이 담겨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16일 하룻동안 대남 언사가 극과 극을 달린 점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북한은 이날 오전에는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키 리졸브 훈련 등에 따른) 모든 후과(결과)에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우리를 비난했다. 정부 관계자는 "몇 시간 만에 냉ㆍ온탕을 오간 북측의 말을 어떻게 신뢰하겠느냐"며 "경색된 남북관계 책임을 떠넘기려는 적반하장식 태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의 거부 입장은 북측이 제안을 내놓은 직후 열린 국가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결정됐다. 16일 심야에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 주재로 소집된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유화 공세가 "도발 명분을 쌓기 위한 위장평화 전술일 가능성이 크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북측 제의는 다음 달 시작하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겨냥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제이 카니 미국 백악관 대변인이 16일(현지시간)"한국과의 군사적 관계나 훈련 등에서 변경할 게 없다"고 일축한 것처럼, 한미 양국이 취소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군사적 긴장 완화 이슈를 선점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제의를 내놨다는 것이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측은 우리가 거부할 경우 도발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우리 내부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고조되는 효과도 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북측이 공언한 '실천적 행동'에 대해서는 향후 추이를 면밀히 주시할 방침이다. 북측의 구체 조치가 우리가 의심하는 진정성을 판별할 바로미터라는 점에서다. 이와 관련, 외교안보 당국은'대남 비방 전단지 살포 중단→동계훈련 일시 중지→회담 제안' 등 북측이 내놓을 수 있는 '3단계 예상 시나리오'를 토대로 향후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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