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당국의 조작 의혹이 제기되며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려 온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서도 검찰은 "유서는 강씨가 쓴 것"이라며 재판부에 항소기각을 요청했다. 지난해 12월 검찰이 신청한 필적 감정에 대해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취지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가 나왔는데도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6일 서울고법 형사 10부(부장 권기훈) 심리로 열린 강기훈씨의 자살방조 혐의 재심 결심공판에서 검찰과 강씨 측은 강씨와 유서의 필체가 동일하다고 판단한 1991년 국과수 감정결과와 그 반대의 결론을 낸 2007년, 2013년 감정 결과를 놓고 첨예하게 맞섰다.
검찰은 1991년 5월 고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자 김씨와 전민련 활동을 함께한 동료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줘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했다. 징역 3년이 확정돼 만기 출소한 강씨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에 따라 2008년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아 다시 재판을 받아왔다.
재심의 쟁점 역시 강씨가 유서를 대필했는지 여부였다. 사건 당시 국과수는 고 김기설씨가 작성한 것으로 확인된 주민등록증 분실신고서, 이력서, 편지 등은 유서의 필체와 다르고 강씨의 수첩 및 자술서 등에 기재된 필체는 유서와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2007년 과거사위원회는 김씨가 쓴 전대협 노트 및 낙서장과 강씨가 작성한 출정거부이유서 및 봉함엽서 등을 추가해 국과수에 다시 감정을 요청했다. 국과수는 91년과는 달리 새로 추가된 김씨의 노트 및 낙서장은 유서와 필체가 일치하고 출정거부이유서 및 봉함엽서의 필체는 유서와 다르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재심이 시작된 뒤 검찰이 재차 요청한 필적 감정에 대해 국과수는 김씨의 이력서 등을 비롯해 유서와 필체가 같다고 인정된 전대협 노트 및 낙서장에 대해 "동일 필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씨가 작성한 것으로 확인된 자료와 유서 등의 필체가 모두 동일하다는 취지로, 유서는 김씨 본인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결론이다.
그러나 검찰은 스스로 신청한 감정 결과를 배척했다. 검찰은 이 결과에 대해 "(강씨의 필체와 유서 필체가 다르다는) 예단을 갖고 내린 2007년 국과수 결론을 토대로 나온 것"이라며 "91년 국과수 감정 결과의 신빙성이 가장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어 "뒤늦게 김씨의 전대협 노트 및 낙서장을 발견했다는 친구 한모씨 진술 역시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유서는 모두 강씨가 작성한 것" 이라고 덧붙였다.
강씨 측 변호인은 "91년 국과수 감정 결과 외에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는 없다"며 "최근 검찰이 신청해 나온 국과수 재감정 결과도 검찰 주장과 배치된다"고 반박했다. 변호인은 이어 "이 사건의 발단은 친구가 운동권 동료의 자살을 유도했다는 검찰의 비인간적인 추측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며 강씨의 무죄를 주장했다.
강씨는 이날 A4 용지 10장 분량의 최후진술서를 읽어 내리며 동료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누명을 쓰고 살아온 지난 22년 간의 고통을 토로했다. 그는 "유서가 대필됐다는 기사를 처음 접했을 당시엔 20년을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삶을 흔드는 사건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며 "법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편견을 가지게 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지 생각하게 하는 데 참고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고 공판은 다음달 13일 열린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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