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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1월 14일] 두 발로 여행을 하리라

입력
2014.01.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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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해도 싫증 나지 않는 게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여행이다. 물론 같은 곳을 가고 또 가고 하는 마니아도 있겠지만 나는 같은 곳을 두 번 가는 건 썩 즐기지 않는다. 세상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간 곳을 또 간단 말인가. 그래서 가본 적 없는 곳을 가는 게 즐겁다. 그러나 워낙 게으른 탓에 가본 적 없는 곳조차 가지 않는다. 대신 방안에 앉아 홀로 여행하기를 즐긴다. 이 여행은 워낙 값이 싼데다 날줄과 씨줄로 여행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여행인가.

어제는 1907년 아일랜드 더블린 시로 여행을 갔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현지 가이드,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가이드는 자신의 설명이 부족하면 참고하라고 직접 쓴 가이드북까지 제공해 주었다. 제목은 . 그저께는 세잔과 르누아르를 만났다. 이 친구들 그림은 다 그게 그거인 듯해서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막상 만난 후 그림 설명을 직접 듣고 나니 그들 그림 한 점 살 돈을 갖지 못한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물론 가이드(존 리월드)와 가이드북()은 필수다.

그 전날은 고 안병희 교수의 가이드와 가이드북()과 함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을 만났다. 참 많은 여행을 했지만, 이처럼 희열을 느낀 여행은 흔치 않았다. 한글의 모아쓰기, 즉 초성+중성+종성을 모아 한 글자로 만들게 된 배경설명을 듣고 나니 온몸이 흔들렸다. "그런데 훗날 후손들이 기계화에 유리하고 알파벳처럼 쓰기 편하다고 해서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단다. 다행히 이제는 그런 논의는 사라진 듯하지만."

왜 한글이 세계 유일의 음소문자이면서도 모아쓰기를 했는지 여행을 통해 알고 나니 한글에 대해 막연히 세계 최고의 글자라고 외치는 따위의 값싼 애국심은 사라지고, 학문이란 것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알게 됐다.

며칠 전에는 올해 환갑을 맞이하는 한 신문을 타고 여행을 떠났다. 2014년 오늘, 옛 모습은 모두 사라져 버린 탄광 지역에서 1980년 광부와 그들의 가족들이 나서 "인간답게 살게 해 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다. 그뿐인가. 신문이 창간되던 해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환희에 찬 여행이 가능하다. 그 해는 내가 이 땅에 발을 딛기도 전이다. 그러나 그 여행을 통해 나는 그 해가 지금 이 순간과 맞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여행을 떠나게 되면 늘 느끼는 것이, 가이드와 가이드북에 대한 감사다. 여느 가이드들과는 달리 이들은 쇼핑센터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 특산품 판매장으로 나를 안내할지, 특산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내게 꽂힐 싸늘한 시선의 강도가 얼마나 될지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그들이 기록하고 증언하는 내용들이 단순히 한 여행자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될 것임을 알기에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주관이 개입된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까지 제공한다.

그러니 튼튼한 두 발은 잠시 쉬게 하고, 늘 눈과 머리만을 지참한 채 날줄과 씨줄을 가로질러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값싸고, 손쉽고, 쓸모없는 쇼핑 걱정, 옵션 관광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나아가 가이드 팁이니 유류할증료니 바가지요금이니 하는 따위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부담 또한 절대 없으니 금상첨화다.

그러나 올해는 두 발로 가는 여행을 더 많이 떠나겠다고 다짐한다. 산다는 것은 새해 첫날 산 정상에서 새로운 햇빛을 바라보며 경건함과 소란조차 함께했던 많은 이웃들과 걸음을 맞추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홀로 지구 밖으로 뛰쳐나가고 고조선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오늘 이 순간 나를 둘러싸고 아우성치는 이웃들과 함께 웃고, 울고, 굶주리고, 함께 외치며 두 손을 맞잡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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