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웅'에서 '베이루트의 도살자'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역사의 산증인으로 극단적 평가를 받아 온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가 11일(현지시간) 타계했다. 그의 가족들은 2006년 뇌졸중으로 쓰려진 뒤 혼수상태로 8년간 투병해 온 샤론 전 총리가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향년 85세.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정치인으로 팔레스타인 강경 정책을 추진해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반면 총리 재임 후반기에는 40년 가까이 점령했던 가자지구를 스스로 포기해 '배신자'로 불리기도 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극단적 강경 정책과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함으로써 숱한 논란을 일으켰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이 존재하도록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ㆍ팔 분쟁의 역사를 이끈 '불도저'
군 장성 출신인 샤론 전 총리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과의 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어 왔다. 그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직후 아랍국가들의 침공으로 시작된 1차 중동전쟁을 포함해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현재의 이스라엘 영역을 만든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때는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고, 1973년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에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국방부 장관이었던 1982년에는 레바논에 본부를 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수도 베이루트에 대한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메나헴 베긴 당시 총리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샤론의 일방적 공격이었다. '레바논 침공'으로 불리는 이 공격은 이스라엘군 통제를 받던 베이루트 난민캠프 2곳에서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을 학살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그에겐 '베이루트의 도살자'라는 오명이 붙었고, 국방장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샤론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팔레스타인 압박 정책을 추진했다. 정착촌을 꾸준히 확장하는가 하면 2000년 9월에는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전격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이곳을 이스라엘의 대(大)예루살렘 건설의 거점으로 삼겠다고 밝혔는데,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샤론의 사원 방문은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봉기)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말년의 회심(回心)...'역사적 철수'
총리 재선에 성공한 2003년 이후 샤론의 팔레스타인 강경 정책에 변화가 나타났다. 38년간 점령했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포기하기로 하는 등 유화책을 병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외신들은 그의 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시기를 2001년 총리 당선 직후로 보기도 한다. 그는 2001년 팔레스타인 국가 지위의 불가피성을 처음 언급한 바 있다.
샤론은 "이스라엘 안보를 위해 가자지구에서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이스라엘 내부의 반발은 거셌다. 2003년 12월 샤론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내 정착촌 철거 계획을 발표하자 이듬해 의회는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부결됐다. 샤론은 또 이를 실행하기 위해 강경 우파가 포진한 집권 리쿠드당을 탈당해 중도 신당인 카디마당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는 이에 앞서 2005년 2월에는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휴전을 합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신당 창당 뒤인 2006년 1월 총선 유세 도중 과로로 쓰러졌다. 이후 수 차례 뇌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NYT는 "만약 샤론이 2006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정까지 맺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의 타계에 엇갈린 반응들
샤론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뒤 이스라엘과 우방인 미국, 팔레스타인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은 샤론의 서거에 머리를 숙인다"고 밝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샤론은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며 "미국 국민을 대신해 샤론의 가족과 이스라엘 국민에게 가장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샤론의 장례식에 조 바이든 부통령을 조문단 대표로 파견키로 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부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추도 성명에서 "샤론은 자신의 삶을 이스라엘에 바친 지도자"라고 애도했다.
반면 팔레스타인에선 그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샤론은 팔레스타인에 재앙을 안겨준 범죄자"라며 "지옥에나 가라"고 맹비난했고,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는 그의 사망을 축하하는 총성이 곳곳에서 들렸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신정훈기자 h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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